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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자료실

경주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慶州南山 天龍寺址 三層石塔)

노촌魯村 2017. 4. 15. 23:49


<2017.4.15 경주남산 천룡사 절터>

경주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慶州南山 天龍寺址 三層石塔.보물 제1188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번지)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출처:문화재청)










경주남산 천룡사지 석조 유구








석조石槽

돌거북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 뒷편 신축한 법당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에서 본 고위산

경주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과 백운암 중간에 위한 고위산 천룡사(불국사 말사)

 


천룡사지 부근에서 본 야생화





 



2006.03.05에 블로그에 올린 글

천룡사지가 있는 천룡계곡은 서남산의 제일 마지막 계곡 용장계곡의 다음 계곡이다. 그 장상을 통상 고위산이라고 한다, 천룡사라는 절은 신라 당시에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 아주 존중받았던 곳이다. 그래서 석가만일도량을 열고 국토의 안위를 기원한 곳이 천룡사였다. 절이 천룡사라고 불리게 된 유래, 그리고 이 곳을 중수하여 힘썼던 뜻있는 이들의 노력은 삼국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토론삼한집에 말하기를 "계림 땅에 딴 곳에서 흫러온 물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이룬다"고 하였다. 한번은 중국의 사신 악붕귀가 와서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했다.

옛날에 이름을 전하지 않는 시주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천녀. 용녀라고 했다. 부모는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천룡사라고 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 말엽에 이르려 쇄잔해 지고 말았다.

유명한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이 젖을 먹여 키웠다는 최은함의 증손이었던 시중 최제안이 이 절을 새로 일으켜서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그는 또 조정의 명을 받들어서 신서의 원문까지 절에 남겨 두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여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나타내었다고 전한다.

중국 사신 악붕귀는 사천왕사의 허실을 탐지하기 위하여 왔던 사신이었다. 따라서 천룡사는 적어도 신라 삼국통일 이전부터 있었던 절이라고 볼 수 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천룡사가 언제 황폐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최재안의 중건은 고려 정종 7년(1040) 이었으니, 신라말에 황폐되었던 절을 고려초에 중수헀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폐탑은 최근에 복원되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도 남았있다. 그리고 석조 및 맷돌 등 많은 석재가 있다.

주춧돌

 천룡사지 삼층석탑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문화재청) 


 1970년대의 천룡사지의 모습

 

천룡사지 삼층석탑 복원 전의 모양

 

 

천룡사지 발굴

 

천룡사지 발굴조사 전경(출처:문화재청)

경주 남산 천룡사에 관한 문헌기록은《삼국유사(三國遺事)》에 최초로 등장하여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에 간행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간기(刊記)에도 '천룡사개간(天龍寺開刊)'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법통이 끊이지 않고 계속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번의 발굴조사는 그 조사대상지역이 협소함에도 불구, 고려시대 이후 금당이 3차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금당은 후대에 이를수록 탑과의 거리가 좁아지면서 중수된 특징을 가지며, 다른 부속건물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수차에 걸쳐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사대상지역 내에서 천룡사의 초창기 즉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언급한 7세기대 이전의 가람배치는 확인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역이 현재의 탑 주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훨씬 넓은 범위에 걸쳐 조성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유물은 고배대각편을 비롯, 인화문토기편과 통일신라시대 연화문막새편 등이 고려나 조선시대 유물에 비해 소량 출토되었는데 선대유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유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주변의 금당지 조사에서 고려시대 이후, 즉 천룡사의 역사로 보아 중대(中代) 이후로 볼 수 있는 유구가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는 조사지역의 제한, 유구보존을 위하여 상부 유구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탐색조사만 실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문화재청 자료)

 귀부

 

 

 

 맷돌

 

 

 

 석조

 

 

 천룡사지 출토 유물 :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천룡사지 삼층석탑 출토 불상류(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

천룡사지 삼층석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폐탑이 된 탑지 기단부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금동보살좌상 1구, 금동여래입상 3구. 금동불두 1구, 불상편 1점, 금동불상대좌 2점의 불상류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불상류는 탑 지대석 아래 적심 부분에 의도적으로 매납된 것은 확실하나 사리구와 지진구적인 성격도 배제하기 어려우며, 파손 된 불상을 부처님의 묘처(墓處)인 불탑에 안장(安葬)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慶州市史3)

 

 

고위산(용장계곡 쪽)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천룡사지에서 북서 방향)

 

 

 

 

 

 

 

 

  

와룡정사(화재로 소실된 건물) : 천룡사지 아래 와룡동천

 

 

 

 

 

 

 

신화와 설화로 만나는 문화재 여행(유형 문화재 중심)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5.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