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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충장사(忠壯祠)

노촌魯村 2017. 4. 29. 08:15

충장사(忠壯祠. 광주광역시북구 송강로 13 (금곡동))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8~1596년)장군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 제실(齋室), 유물관, 그리고 장군 묘역으로 이루어진 사우(祠宇)이다.
김덕령 장군은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붕변의 둘째 아들로태어나 송강 정철 등과 함께 수학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여 많은전과를 올렸던 명장이다.
사우배치를 보면 본당인 충장사와 내삼문, 외삼문과 동제, 서제, 은륜비각, 유물관, 관리사무소그리고 연못을 비롯한 조경시설 등인데 모두가 전통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과 정감을 살려서 장엄한 경관을 갖추었다.
유물관의 전시품 중 특히 충장공의 의복은 중용민속자료 111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의 의의가 큰 유물이다. 한땀한땀, 손으로 만들어진 이 의복들은 남자들이 전쟁 당시 입고 나갔던호신용 전포로서, 동네 부녀자들이 무운과 행운을 빌며 만들었다고 한다.(출처 : 광주광역시청)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유물전시관, 김덕령의 묘역 등이 자리하고 있다.
  1971년 경향의 저명인사를 중심으로 ‘충장공김덕령장군사우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충효초등학교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충효동 오월당(梧月堂)에 터를 잡았었는데 너무 좁다는 기술진의 자문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이동해 충장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추진위원회는 1974년 ‘충장공김덕령장군유적보존회’로 개편하여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975년 2월에 완공했다.
  충장사는 내삼문인 익호문, 외삼문인 충용문이 있으며,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恩輪碑閣), 유물전시관, 관리사무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을 살려 장엄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충장사 뒤편으로는 김덕령 일가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다. 김덕령의 묘는 원래 금곡동에 있었으나 1974년 9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한편 유물전시관에는 1791년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및 김덕령의 친필 편지글, 1974년 11월 17일 김덕령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출토되었던 관곽(棺槨) 및 의복들이 보존되어 있다. 
  충장사 내에는 김덕령은륜비(金德齡恩綸碑)가 서 있는데, 헌종 8년(1842)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원래 이 비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있었으나 나중에 충장사로 옮겨진 것이다.(출처 :무등산웹생태박물관)


경내에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돼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충장사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하며, 내삼문은 광해군이 내려준 익호장군을 따 '익호문'이라했고, 외삼문은 선조가 내려준 충용장군의 이름을 따 '충용문'이라 했다.






김덕령은륜비각

충장사 내에는 김덕령은륜비(金德齡恩綸碑)가 서 있는데, 헌종 8년(1842)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원래 이 비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있었으나 나중에 충장사로 옮겨진 것이다.



유물전시관에는 1791년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및 김덕령의 친필 편지글, 1974년 11월 17일 김덕령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출토되었던 관곽(棺槨) 및 의복들이 보존되어 있다. 

백무명겹직령포

김덕령장군 의복(金德齡將軍 衣服.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광주광역시 북구 서하로 48-25 (용봉동, 광주시립민속박물관))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의복들이다.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때 담양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 철수했다고 한다. 선조 28년(1595) 적장과 내통한다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이듬해 옥사하였다. 영조때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광주 의열사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출토된 그의 의복에는 조선시대 문무관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왕을 호위할 때, 또는 국난시에 입었던 철릭의 여름용과 겨울용 2점, 두루마기와 같은 모습이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아 이름 붙여진 직령포가 춘추용과 겨울용 4점, 그리고 저고리 1점과 바지 1점 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릭은 임진왜란 당시 그가 입었던 것으로 위급시에 양팔을 모두 뗄 수 있게 만들었다. 여름옷은 흰모시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두터운 솜을 넣고 누빈 것으로 길이도 여름용보다 더 길게 하여 방한용으로 입었다.
직령포는 흰 무명을 곱게 누빈 춘추용과 솜을 두텁게 두고 누빈 겨울용이 있다. 특히 명주직령포는 삭아서 솜만 남았으나 다른 옷들은 등솔기에서 소매 끝까지의 화장길이가 85㎝인데 비해 129㎝로 길다. 따라서 이것은 생존시에 입었던 옷이 아니라 시신을 입히기 위해 특별히 만든 수의로 보인다.
저고리는 겉은 굵은 면이고 속은 마로 안에 솜을 둔 것이고, 바지는 현재 솜만 남았으나 바지 형체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옷들은 16세기말의 것들로 복식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출처:문화재청)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김덕령장군의 묘역

충장사 뒤편으로는 김덕령장군 일가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다. 김덕령의 묘는 원래 금곡동에 있었으나 1974년 9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연못

 김덕령 장군이 죽기 전에 옥중 생활의 심정을 노래한 「춘산곡」이 전해진다.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김덕령의 춘산곡시비는 현재 광주광역시 내 사직공원에 세워져 있다.

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불이 붙어 다 타는구나
저 산에 일어난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
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은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