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북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

노촌魯村 2017. 5. 2. 05:06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 충북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 (벽암리))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595∼673)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676)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1926년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고, 1975년 정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출처 : 문하재청)

 길상사중건사적비[조건상이 글을 짓고 이상복이 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천현 산천조와 사묘조에 “신라진평왕시 만로군태수 김서현 처 만명 임신 20월생 자왈유진 상태어현15리 화위신 인위태령산 자신라시 치사우춘추강향축행제 고려잉지지 본조 태조 8년 시정지 영소재관치제”라 하여 신라 때부터 장군의 태가 묻힌 태령산 아래 서발한 사우를 건립하고 국행제를 지내오다가 1408년(태종 8)부터 관행제로 치제하였다.

그 뒤 임진·병자 양란시 병화를 입어 폐허가 된 것을 1851년(철종 2) 백곡면 구수리 개죽마을의 죽계사 자리에 계양묘를 건립하였으나 1926년에 도당산에 진천 길상사를 재건하고 1959년에 개축하였다. 1976년에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진천 길상사를 전면 신축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유신金庾信장군

본관은 김해(金海). 가야국 김수로왕의 12세손이며, 아버지는 만로군 태수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 갈문왕인 숙흘종(粛訖宗)의 딸 만명부인(万明夫人)이다.
김유신(金庾信)[595~673]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을 수양하였다. 629년(진평왕 51) 중당(中幢)의 당주로서 청주의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한 뒤 경상도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644년(선덕여왕 13)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에 오르고 백제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였다. 647년(진덕여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과 염종을 진압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무산성·감물성·동잠성 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 백제가 점령한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되찾고 이찬이 되었고 상주행군대총관의 지위에 올랐다. 649년(진덕여왕 3)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하였다. 654년 진덕여왕 사후에 알천과 협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660년 상대등의 지위에 오른 뒤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동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했다. 673년(문무왕 13) 가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벌[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정]에 장사 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우게 하여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그곳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76년에 세운 김유신장군사적비[이은상이 글을 짓고 김충현이 씀]

1957년 세운 흥무대왕신성비[이선근이 글을 짓고 김만희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