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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이상설 생가(鎭川 李相卨 生家) 및 숭열사(崇烈祠)

노촌魯村 2017. 5. 27. 06:29



진천 이상설 생가(鎭川 李相卨 生家.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충북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산척리))

독립운동가인 이상설(1870∼1917) 선생의 생가로, 선생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호는 보재이다.
선생은 이시영, 이규형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못해 길거리에서 연설한 후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연해주에서 생애를 마쳤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흙벽돌로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이다. 40여년 전에 무너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수리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되어 이완용 박제순등의 찬성을 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되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지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출처 : 진천군청)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이 태어난 생가로 목조초가집으로 안채와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숭열사(崇烈祠.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이상설안길 10))
숭렬사(崇烈祠)는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 반인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반 칸의 앞퇴를 두고 있으며, 회와 돌을 섞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숭렬사(崇烈祠) 정면에는 솟을삼문이 있으며, 솟을삼문에는 ‘숭렬사(崇烈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재(溥齋)이선생(二先生)상설(相卨)유허비(遺墟碑)

숭렬사(崇烈祠) 외정 오른편에는 동상과 유허비가 있으며, 왼편에는 숭모비(崇募碑)가 서 있다.





숭모비는 보호비각 안에 있으며, 거북 대좌 위에 높이 210㎝, 두께 45㎝, 너비 75㎝의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형상의 이수를 얹어 놓았다. 유허비는 19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진천 이상설 생가의 오른쪽 외정에 있는데, 2단의 대리석 기단 위에 비갈 형식으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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