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사적 제130호.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출처:문화재청)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른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삼랑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는데 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 정족산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등을 봉안했으며, 군사 시설로 정족진을 설치했었다(출처:강화군청)
삼랑성 남문
삼랑성 동문 및 양헌수 전승비각
양헌수(梁憲洙): 1816년(순조16) ∼ 1888(고종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 자는 경보. 부사정 종임의 아들이다.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1848년(현종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삼상관에 올랐다.
1865년(고종2) 제주 목사로써 전 판관 배기호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해를 더 잉임하였다.
1866년 어영청의 천총으로 준천사의도청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되었다. 순무중군 이용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 이현규와 함께 17명의 초관과 경초군 121명, 표하군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 의 손돌 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중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 제독이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대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연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잉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5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5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듯 하며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 홍순목, 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 김병시, 김기석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에 임명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는 서양국가와의 최초의 전쟁으로 당시 서양 세력이 동양인을 깔보고, 식민지 정책을 확장하던 때인지라 이 한마당 싸움으로 그들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하여준 쾨거라 하겠다. 당사 프랑스는 동양함대를 앞세우고, 종교적으로(천주교) 민심을 사고 무력으로 안남제국(월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석권하고 인도네시아의 넓은 영역을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50배도 넘는 영토를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그 위세를 영국과 더불어 세계 만방에 떨치며 오만 방자하게 약소국가를 위협하고 괴롭혔다.
이 프랑스군이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공략하고,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여 성안은 아비규환 그것이었으며, 당시 강화성에는 외규장각이 있어 국보급 장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강화행궁 안에는 금, 은, 보화와 진귀한 보물이 꽉 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출 도적질하여 가지고 갔으며, 그 외 것은 불질러 다 태워버리고 성안의 궁궐, 민가 할 것없이 닥치는 데로 불살라 버리고 도주하여 강화성은 황폐화되었다. 현재도 프랑스와 외교적으로 타협하여 국보급 문화재 반환 교섭을 하고 있으나 프랑스의 무성의로 반환이 이루워 지지 못하고 있다.
전등사 동문 안에는 그의 위대한 호국승전을 기리기 위한 승전비가 있다. 정족산성 남문 바로 왼쪽에 밑글텅만 남은 썩은 고목나무 한그루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데 나라에 위험이 닥칠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동양함대 침공이 있었던 10월의 밤에도 이 나무는 밤새워 울었다고 한다. 양헌수 부대는 이 나무의 울음소리를 듣고 프랑스군의 침공을 미리 감지하고 만반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출처:강화군청)
성벽상부
수구문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 산성 안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던 사고.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 4) 11월 실록각(實錄閣)의 실화사건(失火事件)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 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파손되어 빈터만 남아 있던것을, 전등사에 보존되어 오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당시의 현판과 함께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족산사고함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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