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사적 제226호.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73번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출처:문화재청)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숙종 대에 이곳에 덕진정사라는 행궁을 지었다. 이후 행궁이 읍내에 새로 건립되면서 덕진정사는 폐지됐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출처:강화군청)
德鎭三月柳如絲
삼월의 덕진은 수양버들 늘어졌고
白首漁翁勸碧后
흰 머리 난 늙은 어부는 술잔을 권하네
鎭舘緣何多變革
덕진 진관은 어인 연유로 그리 많이 변했는가
滿江水色何前時
강 가득한 물빛은 예전과 똑 같은데
화남 고재형(1846-1916)
강화에서 태어나 묻힌 선비로 1906년 강화도를 다니며 시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셨다
남장포대(南障砲臺)
덕진돈대
덕진돈대(남쪽) 옆 경고비로 가는 길
해문방수비는 불은면 덕성리 836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덕진진 경내에 1기가 있다. 이 비는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 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경고비(警告碑)라고도 부른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47cm, 폭이 54.5cm, 두께가 28cm의 단면비이다.
비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시 쇄국정책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경고비 우측에 남은 총탄의 흔적이 죽음을 각오하고 조국을 지켜내고자 애썼던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일깨워준다.
경고비와 강화해협(멀리 초지대교가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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