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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금장대(金藏臺). 경주석장동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

노촌魯村 2017. 10. 21. 21:42


  금장대는 봉황대와 함께 경주의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있던 절 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 따서 금장대(金藏臺)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은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었다 간다고 하여 경주의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이라 불리워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 가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그리고 금장대의 아래에 만들어진 예기청소(藝妓淸沼)는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것으로,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적이 같이 공존하는 곳이다. 금장대가 위치하는 구릉 전체는 고분군이며, 그중 도굴흔적이 잘 남아 있는 무덤이 남북 두 개의 봉우리 정상부에 각기 1개씩 있다. 그리고 이곳엔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으로 공덕을 쌓고자 했던 금장사지, 그리고 화랑의 수련터, 조선시대 건물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적이 작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 때 주거지, 사리공양석상과 거북문석상, 임신서기석, 고인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금장대는 시대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그 공간적인 의미가 달리 이해되어 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곳은 시인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던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경주의 넓은 평지에 가장 큰 물길과 물가에 자리한 구릉이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니고 있는 금장대는 이런 다양한 문화적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자료출처:경주시청)






금장대에서 본 경주

경주석장동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 경상북도 기념물  제98호. 경북 경주시 석장동 산38-1번지)

암각화란 바위나 동굴의 벽면에 기호나 물건의 모양을 새겨 놓은 그림을 이른다. 이 암각화는 경주 평야를 가로지르는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북쪽 바위벽에 그려진 것이다.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그림은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범위에 새겨져,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두 27점이 확인되었는데, 기하문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성기(女性器) 3점, 배 1점, 그외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등이 있다.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색이다. 특히 검과 결합된 여성기의 그림 등은 칠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2017년 3월 1일에 블로그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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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대 밑은 물이 깊고 맑아서 과거부터 예기청소(藝岐淸沼)라고 불려졌다. 석장동 암각화는 예기청소 바로 위쪽 암벽에 새겨져 있다. 그림이 새겨진 암면 앞의 공간은 2m 내외의 좁은 공간이지만 인위적으로 편평하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서 이곳이 의식을 거행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경주석장동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시도기념물 제98호 (경주시).경북 경주시  석장동 산38-1)

암각화란 바위나 동굴의 벽면에 기호나 물건의 모양을 새겨 놓은 그림을 이른다. 이 암각화는 경주 평야를 가로지르는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북쪽 바위벽에 그려진 것이다.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그림은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범위에 새겨져,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두 27점이 확인되었는데, 기하문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성기(女性器) 3점, 배 1점, 그외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등이 있다.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색이다. 특히 검과 결합된 여성기의 그림 등은 칠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자료)

 

암각화 탁본

 

 

 

 

 

 

 

 

 

 

복원 공사를 마치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인 경주 금장대 조감도.

금장대에 정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2010년 발굴조사에 나서 동서 18m, 남북 10m 크기의 정자 흔적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총 사업비 29억원을 들여 금장대 정자와 주차장, 진입로 교량, 안내판 설치 공사를 하고 있다.

금장대 주차장과 금장대 사이에 있는 홍도 추모비

 홍도 최계옥(1778~1822년)은 조선 정조 임금으로부터 홍도(紅桃)라는 별호를 받은 기생으로 '황진이', '매창'과 더불어 그 이름을 크게 떨친 천재예술인이며 특히 후학양성에 전념한 인물이다. 홍도가 죽음을 맞이한 30년 후 경주의 풍류객 및 교방의 악공과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 묘지를 관리해 왔다. 하지만 2005년 무연고 분묘로 훼손됨을 안타까이 여겨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홍도의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고자 글을 짓고, 글을 새기고, 추모비를 만들고, 재원을 마련해 건립하게 됐다.(건립일 :2016.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