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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와 배롱나무

노촌魯村 2017. 8. 24. 06:55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사적  제138호.경북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동) )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경주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출처:문화재청)


이 못은 신라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신라 유적이다. 신라 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해인 488년에 남산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 때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가보라”고 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가에 와서 두 마리의 돼가가 싸우고 있는 것에 정신이 파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주므로 왕게게 그 봉투를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이 궁주와 서로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뜻에서 못 이름을 서출지라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1월 15일에 까마귀에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의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문화재안내문에서) 


 신이담에 속하는 설화의 하나이다. 신라21대 소지왕 또는 비처왕이 즉위 10년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로 소지왕에 관한 인물 전설이면서,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서출지라는 못의 지명전설이기도 하다.<삼국유사>기이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다.<서출지>,<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 < 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일대에 구전되고 있으나, 보고된 자료는 많지 않다.

 소지왕이 정월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길래 받아보니,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열서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보셔야 합니다."하고 아뢰므로 왕이 열어보니 "거문고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 갑을 쏘니 그안에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하여 매년 정월 상해일. 상자일. 상오일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전설화에서는 소지왕대신 중국의 왕이나 막연하 왕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못에서 나온 노인이나 간통하던 중이 없거나 갈등이라는 그 구실이 희미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적 사상간의 갈등이라는 의미가 약화되고 까마귀를 기리기 위하여 오곡밥을 먹게 되었다는 유래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한편, 점쟁이가 보통사람에게 닥친 비슷한 위기를 해결해주었다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운과 불운에 국한되어, 나라의 운수를 다툰<삼국유사>의 설화에 비하여, 그 의미의 폭이 좁아졌다. 이 설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수수께끼는 그 해결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죽게 되어 있는 '목수수께끼'의 일종이며, 일관이 풀었다는 것은 그 수수께끼가 사회적.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제의적 기능을 지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지왕이 두 명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풍속과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설화에 나타난 왕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보호되는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를 뿐만아니라 노옹의 계시가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여서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신이한 능력을 갖추고 건국신화에 등장하던 왕의 모습이 약화되어, 신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8년 이전에 일어난 토착신앙과 외래신앙 사이의 갈등양상이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당시 왕실과 불승의 관계, 왕에 대한 백성의 인식, 민속적 사실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참고가 될만한 자료이다. (자료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