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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김천

김천 갈항사지(金泉 葛項寺址)

노촌魯村 2018. 8. 12. 09:07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金泉 葛項寺址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45호. 경북 김천시 남면 오봉리 65-1번지)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 높이 1.22m의 불상으로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가슴이 당당하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 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갈항사 3층석탑의 건립 연대인 경덕왕 15년(758)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김천 갈항사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 122㎝의 불상으로 현재 무릎 부분과 손가락들이 파손된 상태이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 불타상을 특징짓는 작은 곱슬머리 형 두발]인데 작고 또렷한 구슬을 줄줄이 늘어 놓은 문양[連珠文]으로 구성되었으며 소라무늬까지 표현되었다.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신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선으로 처리되었으나 위축되거나 가냘픈 편은 아니다.

비교적 넓고 당당한 어깨나 가슴은 골격이 뚜렷하면서도 양감이 있으며, 팔의 근육도 잘 묘사되어 있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는데, 왼손은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오른발 위에 놓았다. 허리는 잘록하여 신체의 굴곡이 잘 표현된 육감적인 조각 수법을 사용하였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얇아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옷깃에 일단 한 번 뒤집은 반전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인도 굽타 기원[Gupta Era] 조각에서 보이는 통견(通肩)의 목 깃 반전 형식이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신체에 비하여 넓고 중량감이 있는 두 무릎은 불상의 자세를 보다 안정감 있게 보이게 한다.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은 다음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놓은 모습을 한 두 다리의 근육이 탄력 있고 긴장감 있게 표현된 것 또한 이 불상의 사실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대좌는 팔각대좌인데 연꽃이 짧고 뚜렷하며 양감을 잘 묘사하였다. 불상 뒤에는 광배를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갈항사지 비로자나불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金泉 葛項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국보 제99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출처 : 문화재청)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2개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2중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그 구조와 양식, 규모가 동일하다. 동탑은 높이 4.3m, 서탑은 높이 4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현재 양 탑 모두 상륜부는 소실되었으며, 서탑은 3층 옥개석이 소실되어 3층 탑신부까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동탑에는 상층기단 오른쪽 우주와 탱주 사이에 탑의 연대와 유래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하층 기단 면석을 하나의 돌로 조성하고, 그 위의 하층 기단 갑석과 상층 기단의 각 부는 하층 기단 9개, 상층 기단 4개의 각기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서탑의 지대석은 자갈 섞인 자연석 암반 위에 하층 기단부가 놓여져 있어 동탑과 차이가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하층 기단 면석에는 각 양쪽에 우주와 2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갑석 상면에는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상층 기단을 놓았다.

상층 기단 면석에도 각 면마다 우주와 2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상면 중앙에는 하층 기단의 갑석과 마찬가지로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서탑의 경우 상층 기단의 측면이 조금 깨어진 상태이다. 상하층 기단의 탱주수로 미루어 볼 때, 이 석탑은 신라 융성기 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다르게 조성하였으며, 양쪽에는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도 각 층이 모두 동일한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5개이며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의 부재를 받치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처마 밑의 선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고, 네 귀퉁이의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여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륜부는 양 탑 모두 상륜부는 소실되었다. 서탑은 3층의 옥개석 부분도 소실되었고 동탑은 노반부터 남아 있는 부재가 없다. 이 석탑의 또 다른 특색은 옥신과 옥개석 처마 부분에 수십 개의 못 구멍이 뚜렷이 보이며, 2층 옥개받침 구석 부분에도 구멍 자리가 발견된다는 것인데, 이 구멍은 탑신 표면에 금동판으로 장식한 것을 고정시키기 위한 추제[금동판을 양각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그 상을 압출해 낸 것]의 상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양탑 모두 초층 탑신의 각 면에 마모가 심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조각해 놓은 듯 흔적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초층 옥신에 못질을 하여 추제상을 장식하고 다른 부분에도 여러 상의 추제품을 덮어 장식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그 초층의 상은 남아 있는 형태나 일반적인 예를 통해 볼 때, 아마도 사천왕상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석탑 이전 당시 석탑을 해체하면서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양 석탑의 기단부에서 길이 75㎝, 두께 33㎝의 자연석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의 거의 같은 크기의 가공한 석재 상면 중앙에 사리공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리공 내에서는 청동기와 도기의 파편 등 사리장치가 수습되었으며, 동탑에서는 청동사리합과 금동사리병, 그리고 서탑에서는 청동주전자·자기조각·썩은 종이·골편 등이 발견되었다. 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각 부분의 비례가 좋아 균형 있는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탑에는 상층기단 오른쪽 우주와 탱주 사이에 탑의 연대와 유래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동탑 기단에 음각으로 자경 6㎝의 행서로 새겨져 있는데 탑의 건립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천보 17년(경덕왕 17)에 조문왕후, 경신대왕의 이모 모씨의 외척인 영묘사의 언적법사 등 3인의 발원으로 세웠다’고 한다[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娚者零妙寺言寂在師旅□□ 姉者照文皇太后君嬭在旅□□妹者敬信大王嬭在也]. 탑명에 보이는 ‘재지(在之)’, ‘재려(在旅)’, ‘재야(在也)’ 등은 이두문(吏讀文)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갈항사지 동탑지 표석

서탑은 3층 옥개석이 소실되어 3층 탑신부까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갈항사지 서탑지 표석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金泉 葛項寺址 東·西 三層石塔 出土 舍利莊嚴具.보물 제1904호.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 )

이 사리장엄구는 1916년에 갈항사 터의 동·서 삼층석탑을 경복궁으로 이건하던 중 발견되었다. 갈항사는 통일신라 초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로 동탑(東塔)의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에 경덕왕(景德王) 17년(758) 언적법사(言寂法師)와 그의 두 누이가 함께 발원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데, 사리장엄구도 탑의 건립과 함께 봉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리장엄구는 동탑과 서탑 모두 동제항아리 안에 금동병이 넣어진 상태로 기단 아래에 마련된 사리공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중 서탑에서 발견된 동제사리호는 뚜껑의 꼭지와 몸통의 두 귀를 청동 끈으로 연결하여 묶은 사리호로 9세기 이후 뼈항아리로 많이 사용된 연결고리 유개호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두 탑의 사리병은 나팔형으로 벌어진 길고 아름다운 목과 균형 잡힌 타원형의 몸통을 가졌는데, 이러한 병의 형태는 8세기대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병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동탑의 사리병은 죽절형의 목과 꽃잎형의 굽을 달아내어 신라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도 엿볼 수 있다. 이 사리기는 통일신라 감은사 식의 전각형 사리기와 달리 호형의 외함 안에 정병과 유사한 금속제 병을 사리병으로 봉안한 독특한 형식의 사리기이다. 최근의 보존처리를 하면서 작은 크기의 금속제 병에서 준제진언(准提眞言) 다라니 1매가 발견되어 당시의 불교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동탑 상층기단에 기록된 건립연대를 통해 사리기의 제작연대와 조성주체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사리기 연구의 절대 기준자료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가치가 크다.(출처 : 문화재청)


석탑 이전 당시 석탑을 해체하면서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양 석탑의 기단부에서 길이 75㎝, 두께 33㎝의 자연석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의 거의 같은 크기의 가공한 석재 상면 중앙에 사리공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리공 내에서는 청동기와 도기의 파편 등 사리장치가 수습되었으며, 동탑에서는 청동사리합과 금동사리병, 그리고 서탑에서는 청동주전자·자기조각·썩은 종이·골편 등이 발견되었다.

일정시 사진

갈항사지 우물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金泉 葛項寺址) 위쪽에 새로 지어진 갈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