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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백양사(長城 白羊寺)

노촌魯村 2018. 10. 4. 14:39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된 감참나무







 

寄題 雙溪樓 

(기제 쌍계루 : 쌍계루에 부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求詩今見白巖僧 

구시금견백암승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의 스님을 만나니,

把筆沉吟愧未能

파필침음괴미능

붓을 잡고 생각에 잠기니 재주없음이 부끄럽네.

淸叟起樓名始重

청수기루명시중

청수가 누각 세워 이제 그 이름이 무겁고,

牧翁作記價還增

목옹작기가환증

목옹이 기문을 지어 더욱 값지네.

烟光縹緲暮山紫

연광표묘모산자

안개빛 어슴프레 저무는 산이 붉고,

月影徘徊秋水澄

월영배회추수징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久向人間煩熱惱

구향인간번열뇌

오랫동안 인간사의 번뇌에 시달렸는데,

拂衣何日共君登

불의하일공군등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볼까.

    

* 淸叟(청수) : 쌍계루를 세운 스님의 인명으로 보인다.

* 牧翁(목옹) :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쌍계루에 목은 선생이 지은 기문이 있다.

목은선생이 지은 "장성현백암사쌍계루기"를 보면 쌍계루를 세운 淸叟스님은 행촌 이암선생의 계씨라고 한다. 

장성백양사백학봉(長城 白羊寺 白鶴峰.명승 제38호.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115-1번지 등)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장성군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로, 백양사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의 암벽 및 식생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백양사가 위치한 백암산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하여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라 할 만하다.
백양사는 백양사 창건 역사를 전하는 정도전의 <정토사교루기>를 비롯하여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면앙정 송순 등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탐방하여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을 남기는 등 예로부터 자연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명승지이다.
특히, 백양사 대웅전 기와지붕과 어우러지는 백학봉과 쌍계루 앞 연못에 비치는 쌍계루와 백학봉의 자태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지금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출처 : 문화재청)

 

  

백양사 백학봉


 

 

 

 


지팡이가 이팝나무로 변했어요


장성 백양사 비자나무 숲 (長城 白羊寺 비자나무 숲. 천연기념물 제153호.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115-1번지)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 주변에 8∼10m에 달하는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현재는 이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 숲이 발견되었다.
이 숲이 형성된 유래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로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절 주변에 심었다고 하며,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스님들은 열매를 거두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우리 선조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숲이므로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백양사사천왕문 (白羊寺四天王門. 시도유형문화재 제44호.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약수리)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이 처음 지은 절이다.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는데,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이 절을 다시 지은 이후부터이다. 환양이 절에 있으면서 매일 『법화경』을 읽을 때 흰 양이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지자 절 이름을 백양사로 고쳤다 한다.
백양사의 정문인 사천왕문은 1917년 송만암에 의해 절이 크게 다시 지어질 때 5년에 걸쳐 지어졌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은 문으로 사용하며, 문의 양 옆칸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사천왕은 불국토의 사방을 보호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모셔져 있다.(출처 : 문화재청)






 

보리수 나무




보리수 나무 열매

만세루




백양사대웅전 (白羊寺大雄殿. 시도유형문화재 제43호.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약수리))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이 처음 지은 후 여러 차례의 공사와 명칭의 변경이 있었던 사찰이다.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이 다시 지은 이후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있으면서 매일 『법화경』을 읽을 때 흰 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지자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은 1917년 절이 다시 지어질 때 같이 세운 것으로,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상과 10척 높이의 불상, 용두관음탱화를 모시고 있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바늘 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는 나한의 그림 16점이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규모가 큰 법당에 속한다. 2단의 긴 돌로 쌓은 기단 가운데로 계단을 두었다.
백양사 대웅전은 일제시대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다포 양식에서 후퇴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백양사 대웅전 내부

백양사 탑전

팔정도 나타내는 팔층석존 사리탑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 팔층탑(八層塔)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가 안치되어 있다.




 

 





 


 

백양사극락보전 (白羊寺極樂寶殿. 시도유형문화재 제32호. 장성 백양사)

백암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이 세웠다고 하는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절은 1917년 송만암이 고쳐 세운 것이다. 
극락보전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한응선사가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사찰사료』를 보면 건물을 지을 때 조선 중종(재위 1506∼1544)의 비인 문정왕후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담담한 기법으로 처리한 단색벽화가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맞배지붕을 가진 건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다포양식으로 절충해 지은 점이 특이하다.(출처 : 문화재청)



장성백양사극락보전목조아미타여래좌상(長城 白羊寺 極樂寶殿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289호. 장성 백양사)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되어 백양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다. 높이 2m가 조금 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목조상으로 나발의 머리에 정상의 계주가 높이 돌출해 있고 전면 중앙 계주는 반달모양을 하고 있다. 얼굴은 사각형이며 이마에 백호가 있고 눈, 코, 입, 귀 등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목에 삼도가 보이며 특히 목이 다른 예에 비해 어깨부위와 확연히 구분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법의는 통견이며 우측 어깨부위는 완전히 노출된 반단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깊게 내려온 U자형의 옷주름과 그 중앙에 세줄의 일자형 띠주름이 선명하다. 수인은 두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하고 있다. 
이 불상은 2005년 2월 발견된 복장물에서 1741년(영조 17) 명부전의 시왕상 중수와 함께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복장기(26×129cm)와 1978년 개금 불사를 시행했다는 중수기문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은, 목부분과 양 어깨부위와의 연결부분이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는 점, 깊게 파여진 U자형의 옷주름과 가슴중앙에 일자형으로 가로 지른 3조의 띠주름 위에 연화문 장식이 없다는 점, 양 어깨에 나타나는 Ω자형의 옷주름과 무릎 밑으로 펼쳐진 Ω자형의 군의자락, 불상의 앉은 자세가 거의 직각이라는 점 등이다. 이를 통하여 17세기 전반기[또는 16세기 후반기]에 조성되어 1741년에 개금했음을 알 수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2m가 넘는 대형으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양식적으로는 1634년에 제작된 선운사 대웅전 삼세불상이나 귀신사 대적광전의 삼신불상과 유사한데, 선운사 불상은 17세기 전반의 조각승 법해(法海)에 의해서 제작된 작품이다. 백양사의 아미타불상도 이 계통일 가능성이 있다.
이 불상은 규모가 크고 조각품으로서도 우수한 작품이다. 또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은 많지 않아서 그 시대의 양식을 보여준다.(출처 : 문화재청)


   




장성 백양사 고불매(長城白羊寺 古佛梅. 천연기념물 제486호. 장성 백양사)

이 매화나무 고목은 매년 3월 말경에 진분홍빛 꽃을 피우는 홍매(紅梅)종류로서, 꽃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가 은은하여 산사의 정취를 돋운다. 아래부터 셋으로 갈라진 줄기 뻗음은 고목의 품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며 모양도 깔끔하여 매화 원래의 기품이 살아있다. 
대체로 1700년경부터 스님들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앞뜰에다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고 한다. 1863년 절을 이쪽으로 옮겨 지을 때, 그때까지 살아남은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도 같이 옮겨 심었다. 그러나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1947년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된 나무로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출처 : 문화재청)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長城 白羊寺 逍遙大師塔.보물 제1346호. 장성 백양사)

이 부도는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있던 것을 백양사 진입로에 위치한 백양사 박물관으로 이전한 상태이며,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1562∼1649)의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탑으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8각형으로, 각 면에는 초화무늬가 조각되었는데, 1면에만 거북 동물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각형 1단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종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과 같이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는 게를 비롯한 8마리의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유곽은 4면에 배치되었는데, 그 안에는 9개의 유두가 돌출되었다. 상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이 있고,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가 조각되었고, 하대와 유곽 사이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액자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새겨서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상륜부는 4마리의 용두(龍頭)가 석종을 움켜 물은 상태인데, 그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보주를 올려놓았다.
소요대사탑은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 용추사와 지리산 연곡사에도 있다. 이 중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은 탑신부에 새겨진 글에 의해서, 조선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백양사 소요대사탑 역시 소요대사가 입적한 시기와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의 건립연대 등으로 보아 1650년을 건립의 하한으로 볼 수 있다.
소요대사는 13세에 백양사에서 불도에 입문하였고 부림(浮林)에게 대장(大藏)을 배운 후 서산대사에게 신지(神旨)를 깨우쳤으며 백양사 조실(祖室)로 있었다.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은 범종의 세부양식이 탑에 표현된 드문 사례이며 주인공이 확실하고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천진암(天眞庵)

천진암은 백양사에서 쌍계루 사이의 길을 따라 약 500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천진암(天眞庵)은 고려 충정왕 2년(1351年)에 각진 국사가 창건(創建)하였고, 1690년에는 소요대사가 천진암(天眞庵)을 백양사 종무소로 설치 운영하였으며, 1701년에 비구니스님 수도장(修道場)으로 지정(指定)된 산내(山內) 유일한 비구니 처소입니다.
6.25사변 전에는 90여분의 비구니스님이 정진할 정도의 큰 수행도량이었으나 전쟁으로 천진암(天眞庵)이 소실되자, 전소된 천진암 터에 비구니 정공스님(~1971)이 천막을 치고 40평 규모의 인법당을 만들어 암자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셨습니다. 그 후 20여 년간 방치(放置)된 상태로 퇴락해 가던 암자를 1986년 비구니 정안(淨岸)스님이 방장 서옹(西翁) 큰 스님의 뜻을 받들어 법당(法堂), 삼성각(三聖閣), 요사채, 화장실을 복원(復原)하고, 비구니 선원(禪院) 불모지(不毛地)였던 호남지역에 1996년 처음으로 비구니 선원(禪院)을 개원(開院) 하여 지금까지 비구니 수행도량(修行道場)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진암 대웅전

천진암 대웅전 부처님

천진암 삼성각

천진암 탱자나무(수령 500년 정도)

천진암 대웅전 앞에서 풍경

천진암 비구니 스님을 닮은 차꽃도 보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차나무는 서서히 차꽃을 피울 준비를  하다가 10월에 들어설 때부터 본격적으로 차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져서 얼음이 얼 무렵까지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데 차분하고 은은한 향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녹차 혹은 발효차 홍차 등을 만들기 위해 조성된 차밭에는 인위적인 차밭관리로 인해서 차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