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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노촌魯村 2018. 10. 6. 00:57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 사적 제242호)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 연 혁
선조 23년(1590) : 기효간, 변성온, 변이중 등 호남 유생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
선조 30년(1597) : 정유재란때 병화로 소실
인조 2년(1624) : 황룡면 증산동에 복설
효종 10년(1659) : 사액(賜額)
현종 3년(1662) : 선액(宣額)
현종 13년(1672) : 수해로 인해 현 필암리로 이건(移建)
정조 10년(1786) : 고암 양자징 추배

사적 제242. 1590(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되어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계생비는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로, 제관(祭官)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제물로 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1957년 사우를 우동사(佑東祠)라 현액(縣額) 하였으며,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2700평과 임야 10정보가 있다.

주요 전각들은 남북 자오선(南北子午線)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남북이 길게 장방형으로 담장을 쌓고 정면 중앙에 누문(樓門)인 확연루를 두었으며, 그 중심축 선상 북쪽에 청절당이 위치하고 있다.

강당 뒤쪽 좌우 대칭되는 곳에 동재와 서재를, 그 북쪽 따로 쌓은 담장 중앙에 내삼문(內三門)을 두고, 안쪽에 사당이 위치함으로써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수법을 이루고 있다.

확연루는 정면 3,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워 주두(柱頭첨차(檐遮소로[小累쇠서[牛舌]로 결구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정면 5, 측면 3칸으로 된 청절당은 중앙에 정면 3, 측면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정면 1, 측면 3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이는 본래의 진원현(珍原縣) 객사를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꾸몄다.

가구(架構)5(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 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우동사는 정면 3, 측면 1칸 반으로, 전면 반 칸은 툇간(退間)으로 개방하였고, 나머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은 바른 층 쌓기로 처리한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툇간의 초석은 단면이 팔각형인 장주형 초석(長柱形礎石)을 이루고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두 개를 놓아 이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중요 전각 외에 진덕재·숭의재는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되어 있고, 목판고는 이익공식의 팔작기와집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확연루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 뿐만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宋詩烈)의 글씨다.('확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넓게 탁 트이고 공평무사하다'는 의미)

청절당(淸節堂)

중앙은 대청, 좌우에 협실, 옛 진원현의 객사건물을 옮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을 인용하였으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글씨다.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가 쓴 '필암서원' 편액
0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이 쓴 '청절당' 편액
경장각(敬藏閣):경장각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에 직접 그려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를 새긴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장각' 편액은 이 건물을 짓도록 한 정조 임금의 친필 글씨다. 묵죽도의 대나무 그림은 인종이 그렸고,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지어 쓴 시가 담겨 있다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墨竹圖)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이며 망이 쳐져 있다.

우동사(祐東祠)

필암서원의 사우로, 북쪽에 하서 김인후 선생, 동쪽에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필암서원 문적 일괄 (筆巖書院 文籍 一括)

필암서원 문적 일괄 (筆巖書院 文籍 一括. 보물 제587호)

필암서원 문적 일괄 (筆巖書院 文籍 一括. 보물 제587호)

필암서원은 조선 선조 23년(1590)에 창건되고, 현종 3년(1662)에 왕에게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여기에는 김인후(1510∼1560)와 양자징(1523∼1594)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삼아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창건당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경까지의 자료들이다. 필암서원 문적 일괄(筆巖書院 文籍 一括)을 보면,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장성부사하첩』등이다.
이것들은 필암서원의 운영과 구성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문화재청)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

                                               -김인후-

김인후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일화(-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

김인후가 50세에 별세한 뒤 그와 친분이 있는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죽어 어떤 천부(天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우뚝한 누각에 난(鸞)새(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옷을 입었다. 흘긋 보니 바로 이웃에 살던 김인후였다. 그런데 저승에서 김인후가 판관을 맡고 있었다. 김인후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라며 이승으로 돌려보내는 길에 다음의 시를 지어 주었다.

'세억은 그 이름이고, 자는 대년(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 신선 뵈었구려(排門來謁紫微仙)/ 일흔일곱이 된 뒤에 다시 만나세(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시길(歸去人間莫浪傳)'

다시 살아난 오세억은 이 사연을 소재상공(蘇齋相公: 노수신)에게 알렸다. 소재 노수신은 김인후와 막역한 사이였다. 오씨는 시에 적힌 대로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서울경찰청과 공조하여 2006년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 내에서 도난당한 전남 유형문화재 제216호 ‘장성필암서원하서유묵목판일괄(56판)’ 중 도난 당한 묵죽도판(墨竹圖板) 3점을 회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도난문화재 관련 첩보를 2019년 7월 입수하여, 문화재매매업자와 문화재사범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고, 끈질긴 수사 끝에 도난문화재를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회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문화재 사범: 문화재 안전관리를 위태롭게 하거나 침해하는 범죄, 또는 그러한 자

 

이번에 회수한 문화재 중 전남유형문화재 제216호 ‘장성필암서원하서유묵목판일괄’은 필암서원 내 경장각에 보관되던 것으로 조선 중기 인종이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하사한 3점이다. 선조 1년(1568)과 영조 46년(1770)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인종)과 신(김인후)의 이상적인 관계를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하서 김인후의 초서체 글씨는 당시 성리학자들 사이에 전형적인 글씨로 모범이 되었고, 묵죽도판을 통해 판각의 변천양식과 조선사회 생활방식을 파악할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 초서체(草書體): 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 획과 획의 생략이 심함

 

특히, 필암서원이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이번에 회수한 문화재를 전시나 교육에 활용할 경우, 필암서원의 가치를 보다 높일 수 있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