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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

노촌魯村 2018. 9. 28. 21:37

금둔사 달마대사상

천년고찰 금둔사 : 금둔사는 해발 679m의 금전산 서쪽에 위치한 금둔사는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낙안조(樂安條)의 기록과 보물 제946호인 금둔사지석불비상과 제 945호인 금둔사지 삼층석탑으로 보아 금둔사의 창건연대를 통일신라때로 추정해오다 순천대학교 박물관(관장 조원래)은 최근 금둔사 지층 120∼150㎝에서 창건 당시 건물지 지층을 발견, 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유구층에서 4동의 건물지를 확인했고, 초석·기단·연화문 숫막새·주름문늬병 등의 유물을 발굴했다. 또 박물관측은 발굴유물을 토대로 금둔사는 9세기경 창건된 사찰임을 확인했다.

이후 1979년 7월 10일 완전 도굴되어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1984년부터 지허 선사가 대웅전과 일주문 선원, 약사전, 요사채, 홍교 등을 복원 중창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출처 : 금둔사)

 

금둔사 대웅전

  

금둔사 대웅전 석가모니불

금둔사 마애불

금둔사 마애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상

동림선원터 축대

동림선원터 입구

동림선원터

순천 금둔사지 삼층석탑(順天 金芚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945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산2-1번지 금둔사)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km 떨어진 금전산의 무너진 절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터를 금둔사라고 추정하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과 8부중상(八部衆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의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양 옆면에는 불상을 향하여 다과를 공양하는 공양상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평평하며, 낙수면은 완만하게 경사지다가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치켜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을 갖추고 있어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 공양상이 새겨져 있는 점은 특이한 예이며, 각 부의 비례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석탑이다. 탑의 뒤편에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문화재청)

 

금둔사지삼층석탑은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 떨어진 금전산(金錢山) 서록폐사지내(西麓廢寺址內)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의 후편(동편)에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대로 추정)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탑의 전면(全面)(서편(西便))으로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각면에는 2추(樞)씩의 안상(眼像)이 조각되었다.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79년 7월 10일 복원하였다.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2중기단(重基壇)의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基壇部)에는 하층기단(下層基壇) 면석(面石)둘레에는 장대석(長臺石)8매를 돌려 지대석(地臺石)을 이루고 있다. (문경의 봉암사(鳳岩寺) 3층석탑에서도 이 예가 보임)) 하대중석(下臺中石)은 하대석(下臺石)과 한 몸으로 조성(造成)되었는데 5매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柱)씩이 모각(模刻)되었으며, 하대갑석(下臺甲石)은 4매로 구성되었으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므로 상면(上面)에는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상대중석(上臺中石)받침이 각출(刻出)되었다. 상대중석(上臺中石)은 4매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撑柱) 1주(柱)씩이 모각(模刻)되었으며 이들 기둥사이 즉 8면에는 8부중상(部衆像)을 강하게 양각(陽刻)하였다.

상대갑석(上臺甲石)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부에는 부상(副橡)이, 상부에는 각형(角形) 2단의 탑신(塔身)받침이 각출되었다. 탑신부(塔身部)에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석(枚石)으로 되었으며, 1층탑신(層塔身)은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었고 전(前) 후면(後面)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가 조각되었으며 좌우면에는 다과(茶菓)를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 양각(陽刻)되어 특이한 수법(手法)을 나타내고 있다. 2, 3층탑신(層塔身)은 우주만 모각(模刻)되었으며, 각 층(層) 옥개석(屋蓋石)은 층급(層級)받침이 각각 5단씩이며 낙수면(落水面) 하단선(下端線)은 수평(水平)으로 되었다.

낙수면은 평박(平薄)하여 완만(完滿)하게 경사지었으며 네 귀에서 반전(反轉)이 강하게 나타나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면에는 각형(角形)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3층 옥개석(屋蓋石) 정부(頂部)에 찰주공(擦柱孔)이 보이며 그 이상은 전실(全失)되었으나 암자 앞마당에 복발(覆鉢)과 앙화편(仰花片)으로 추정되는 부재(部材)가 있는 바 이 석탑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복발(覆鉢) 융기(隆起)된 2조의 횡선(橫線)이 각출되고 4면에 연화문(蓮花文)이 양각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전체 높이는 4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을 갖추고 있는 9세기경의 작품으로 특히 1층탑신 좌우면에 불상을 향하여 다과(茶菓)를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특이한 예(例)로 주목되며 각부의 비례(比例)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수준급의 석탑이다.(출처 : 금둔사)

천년고찰 금둔사 : 금둔사는 해발 679m의 금전산 서쪽에 위치한 금둔사는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낙안조(樂安條)의 기록과 보물 제946호인 금둔사지석불비상과 제 945호인 금둔사지 삼층석탑으로 보아 금둔사의 창건연대를 통일신라때로 추정해오다 순천대학교 박물관(관장 조원래)은 최근 금둔사 지층 120∼150㎝에서 창건 당시 건물지 지층을 발견, 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유구층에서 4동의 건물지를 확인했고, 초석·기단·연화문 숫막새·주름문늬병 등의 유물을 발굴했다. 또 박물관측은 발굴유물을 토대로 금둔사는 9세기경 창건된 사찰임을 확인했다.

이후 1979년 7월 10일 완전 도굴되어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1984년부터 지허 선사가 대웅전과 일주문 선원, 약사전, 요사채, 홍교 등을 복원 중창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출처 : 금둔사)

순천 금둔사지 석조불비상(順天 金芚寺址 石造佛碑像. 보물 제946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산2-1번지 금둔사)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금전산의 서쪽에 있는 절터에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동국여지승람』에 ‘금전산에 금둔사(金芚寺)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붕 모양의 보개(寶蓋)와 대좌(臺座)를 갖춘 이 불상은 직사각형의 평평한 돌 한쪽면에 불상을 조각하여 마치 거대한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낮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솟아있고 얼굴은 원만한 형태이다. 신체는 우아하게 굴곡이 있어 부피감이 느껴지며 단아해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평행의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양 손은 가슴 위로 올려 양 손의 엄지와 검지의 끝을 맞대어 설법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이나 마멸이 심해서 읽어내기 어려운 상태이다. 뒷면의 윗부분에는 보살상을, 아랫부분에는 코끼리상을 조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개는 탑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과 모습이 비슷하다. 대좌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잎과 위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다소 엄숙해진 인상, 투박한 옷자락 등의 표현은 9세기 현실적인 사실주의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뒷면의 윗부분에는 보살상을, 아랫부분에는 코끼리상을 조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둔사지석불은 낙안면(樂安面)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約) 2km 떨어진 금전산(金錢山) 서록(西麓) 폐사지내(廢寺址內)에 있다. 불상(佛像)의 후면(後面)은 암반을 배경으로 하고 후면(서편(西便))에는 약 5m 떨어져 삼층석탑과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금전산(金錢山)에 금둔사(金芚寺)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신부(身部), 보개석(寶蓋石), 대좌석(臺座石)이 각각 분산되어 있었던 것을 1979년 7월 복원하였다.

구조형식 살펴보면 보개(寶蓋) 대좌(臺座)를 갖춘 이 석불입상은 독립상이 아닌 장방형(長方形)의 대형 판석(板石) 전면에 불상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마치 대형(大型) 비상(碑像) 형태로 되었다.
보개는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같은 형태로서 하부는 2단의 각형(角型) 층급(層級)이 있고 저부(底部)의 후면쪽으로 이 판석(板石)을 끼울 수 있는 홈을 파서 불상 판석을 끼웠다. 낙수면(落水面)의 하단선(下端線)은 수평(水平)이며 낙수면도 완만한 경사에 네 귀에서 가볍게 올려 전면(前面) 석탑 옥개석과 동일한 양감(量感)을 준다. 정상(頂上)에는 2단의 각형(角形) 층급(層級)이 각출(刻出)되었다.

 전면의 불상은 원만한 상호이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계)가 낮게 솟았고 이마에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목에는 3도(道)가 있으며 두광(頭光)이 선각(線刻)되었다.
단아한 모습과 우아하게 굴곡진 양감(量感)을 보이는 신체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의습(衣褶)은 평행단상(平行段狀)이나 형식화(形式化)되었다. 하부의 군의(裙衣)는 무릎 부분에서 1단이 겹쳐있고 양 발끝이 노출(露出)되었다.
수인(手印)은 양손을 가슴위로 들어 전법인(轉法印)을 결(結)하고 있다.
후면(後面) 상부(上部)에는 명문(銘文)이 음각(陰刻)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풍화(風化)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며 상단(上端) 중앙부에는 연화좌(蓮花座)에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든듯한 보살상(菩薩像)으로 추정된다.
하단부에는 코끼리상이 약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 앙련석(仰蓮石), 복련석(覆蓮石) 및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을 갖추고 있으나 중대석(中臺石)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은 확인되지 못하였다

현고(現高) 3m, 입상고(立像高) 2m, 삼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석불입상은 비상형태(碑像形態)로 조성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판석 후면에 코끼리상과 명문이 조각되어 있는 것과 보개석(寶蓋石)의 수법 등도 희귀한 예이다. 장방형(長方形) 판석에 양각되었으며 양감이 풍부하고 세부표현이 정교하나 다소 딱딱해진 인상, 투박한 옷자락 등의 표현으로 9세기의 현실적인 사실주의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 금둔사) 

금둔사 한국 토종 차나무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