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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읍성(慶州邑城)

노촌魯村 2019. 7. 27. 22:37

 

경주읍성(慶州邑城. 사적 제96호. 경북 경주시 북부동 1번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주로 중심이 되는 지방도시에 읍성을 쌓았으므로 경주에 읍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이 성이 만들어진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에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둘레가 약 1.2㎞, 높이가 약 4m 정도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어 그 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시가 확장되면서 성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는 동쪽 성벽 약 5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4문 가운데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출처 : 문화재청)















2007년에 촬영한 경주읍성

경주읍성 (크릭하면 원본이 나타남) 

 경주읍성(사적 제96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주로 중심이 되는 지방도시에 읍성을 쌓았으므로 경주에 읍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이 성이 만들어진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에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둘레가 약 1.2㎞, 높이가 약 4m 정도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어 그 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시가 확장되면서 성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는 동쪽 성벽 약 5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4문 가운데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2020년까지 마무리될 경주읍성 복원 조감도. 경주시 제공

천년고도 경주읍성 2020년에 복원 : 천년고도 경주시가 고려시대 축성됐던 경주읍성(慶州邑城)을 복원한다.

경상북도 경주시는 찬란했던 신라천년문화의 우월성을 계승하고 세계 속의 역사문화관광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신라 수도 경주에 경주읍성을 연차적으로 복원 정비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경주시는 경주읍성의 옛 모습을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2020년까지 사업비 605억원을 투입, 2만6469㎡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 150호를 철거하는 한편 복원 기본계획을 세운 뒤 발굴조사와 동북쪽 성체 1100m 및 동북문 복원, 성내유적정비, 경관 및 주변환경 정비 사업 등을 한다.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사업비 140억원을 투입해 토지 1만2801㎡를 매입하고 건물56호를 철거하면서 성체 75m 및 치성 1개소를 복원한 바 있다.
앞으로 경주시는 사업비 437억원을 들여 토지 1만9141㎡ 매입, 건물철거 79호, 발굴조사 및 실시설계, 성체 1025m 및 치성복원, 동북문 복원, 성내 유적정비, 경관 및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순으로 경주읍성을 복원할 방침이다. 
사적 제96호로 지정된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읍성 내에 있었다. 이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성됐으며, 고려 우왕 4년(1378), 조선 태종~세조년간에 개축했고, 임진왜란 때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인조 10년(1632)에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 읍성은 영조 22년(1746)에 다시 개축됐는데 당시 둘레가 약 2300m로 성문으로는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 일부 남은 성체는 이 때의 모습이다.
이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멸실 됐으며, 일부 남아있던 동편 약 75m의 옛 성벽이 허물어져 2004년 복원할 당시 경주읍성의 치(성곽방어를 위해 돌출시킨 부분)보수를 위해 읍성을 해체하자 지반석을 비롯한 성곽 축조 당시의 유구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후 북쪽의 도로변 일부를 발굴한 결과 치의 기초가 그대로 확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