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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군위

증贈 공조판서工曹判書 충의엄공忠毅嚴公 지之 묘墓

노촌魯村 2020. 3. 14. 00:08


군위 산성면 복지회관 앞 네거리 충의공 엄흥도 묘소 안내판

군위 산성면 복지회관 앞 네거리에서 덕림사 방향으로 645m 지점에 도로 변에 주차

테크목 계단길 68m 정도 오르면 충의공 엄흥도 묘소가 있음


증贈 공조판서工曹判書 충의엄공忠毅嚴公 지之 묘墓

(위치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산 108)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 ?~?) 묘소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 재위:1452 ~ 1455)1452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취약한 왕권을 탐낸 수양대군(首陽大君)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영의정이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 145515세의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밀어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한다.

단종은 세조 3(1457) 6월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457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서인(庶人)으로 강봉, 세조 3(1457) 10월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영월 호장(寧越戶長) 엄흥도는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방치된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묻고 영월에서 살 수 없어서 영남으로 몸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했던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가 군위에 있음이 확인됐다고 군위신문 2009916일자로 보도되었다.

김광순 택민국학연구원장(경북대 명예교수·사진)은 2009910일에 울산, 청주, 문경, 안동 등 전국의 영월 엄씨 세거지를 답사하고 탐문 조사한 결과, 엄흥도의 묘가 현재 영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위군 의흥에 있음을 밝혀냈다.(국학연구론총 제3집에 발표한 논문 충의공 엄흥도(忠毅公 嚴興道)의 삶과 묘소 진위에 관한 고찰’)

김광순 원장은 엄흥도가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묻힌 묘소가 있다고 제시된 곳은 영월과 청주, 경상도 의흥 세 곳 중의 하나로 알려져 왔는데 충의공실기와 영월엄씨파보(寧越嚴氏波譜) 등의 기록을 근거로 엄흥도의 묘소가 의흥에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의흥의 광순문(光舜門)이 수대에 걸쳐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의흥 조림산(鳥林山) 신남촌(身南村)에 있는 엄흥도의 묘소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엄흥도가 은거한 곳이 의흥이고 화본리의 묘소가 진묘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김 원장은 단종 시신을 수습할 때 엄흥도를 은밀하게 도운 아들 엄광순(嚴光舜)의 묘와 엄흥도의 묘가 의흥 신남촌 산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어 부자간의 은둔했던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택민국학연구원 학술조사단은 이번 엄흥도 묘소의 진위 확인과 더불어 의흥의 영월엄씨 22세손 엄철업(嚴哲業) 등이 장()을 올려 영조 9(1733) 엄씨 종손에게 군역과 복호(復戶·세금)를 면제하는 완문(完文)이 내려졌음도 이번에 밝혀냈다. 이 완문은 의흥 종손이 약 300년 전부터 내용도 모르고 보관해 온 것으로, 학술조사단 김광순 원장은 의흥 광순문이 엄흥도의 자손임을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귀중한 문서임을 밝혀냈다.

엄흥도 (嚴興道, ?~?) 17세기 중반이후 여말(麗末)의 충신·사육신 등 충효에 대한 재평가 및 대대적인 표창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엄흥도의 후손은 송시열의 건의로 등용되었고 그는 사육신과 함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 1726(영조 19)에 증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1833(순조 33)에는 다시 증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증직되었다. 1877(고종 14)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았다.

爲善被禍 吾所甘心

(위선피화 오소감심)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

엄흥도가 지은 여덟 성어이다.

청령포 차디찬 강물 위에 떠 있는 단종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엄흥도는 이 여덟 성어를 가슴으로 토해 내며 드디어 3족의 멸함을 감수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기로 결심했다.

충의공 엄흥도 묘 아래에 만약을 위하여 만든 가묘(假墓)가 있습니다.

충의공 엄흥도의 묘는 의흥(義興) 신남촌(身南村. 지금의 軍威郡 山城面 花本里) () 월등(越嶝) 자좌(子坐. 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자방인 정북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 蟹穴(게 해.구멍 혈)인데 무덤의 형태가 봉분(封墳)이 하나가 아니고 상하(上下)로 약간 비스듬하게 두 개의 봉분(封墳)이 있다. 이렇게 쓴 이유는 만약 엄흥도의 신분이 사후에라도 탄로가 나서 발각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 예전에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다시 극형에 처하는 형벌로,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걸던 일)의 형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그 화를 면하기 위해 그렇게 썼다는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비석(증贈 공조판서工曹判書 충의엄공忠毅嚴公 지之 묘墓)







묘소 앞에 팔공산 정상이 보임

계절이 이른 봄이라 묘소 주위에는 할미꽃이 지천으로 피고 있었습니다.

 

 

동행한 목로 김성길선생 촬영    

영월엄씨 충의공계 종친회, 자료 4점 국립중앙도서관 전달

세조에게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온 단종이 1457년 목숨을 잃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고 전하는 엄흥도 후손에게 병조가 1733년 내린 고문서가 국가에 기탁됐다.국립중앙도서관은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회로부터 엄흥도 관련 완문(完文·관부에서 발급한 문서), 영월엄씨 족보, 엄흥도 편지 등 3건 4점을 기탁받았다고 2019년 1월 26일밝혔다. 기탁은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는 기증과 달리, 물품을 맡기는 행위를 의미한다.(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