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돈황이라 칭하는 골굴사(骨窟寺)(경주시 문무대왕면 기림로 105-5)
골굴사는 토함산의 이웃산인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잔 오랜 역사를 품은 절이다.
불교가 국교로 번성하던 신라시대 6세기 경, 인도에서 온 광유(光有) 성인 일행이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했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인공 석굴사원으로 한국의 둔황석굴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꼭대기 석굴에는 보물581호로 지정된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국내 관광객은 물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사찰 골굴사는 선무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절이다.
마음의 평화와 참 나를 찾는 불가 전통의 수행법인 ‘선무도’를 체험하고, 시연하는 프로그램이 골굴사에 마련되어 있다.
골굴암 이름의 유래
신라 불상의 소재는 대부분 화강암이지만, 골굴사 불상은 석회암에 조각되었고, 뼈처럼 생긴 바위에 난 굴이라고 해서 골굴이라 이름이 붙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서 석굴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사원인 것이다. 여기에 골굴암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곳 함월산의 골굴석굴에는 수 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우담 정시한이 쓴 '山中日記'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 하였으며, 法堂窟이니 說法窟이니 하는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셔지고 있다. 지금은 보호각을 설치해 놓고 있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 같다.
원효대사 열반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三國遺事'에 보인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이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산중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무렵에도 이미 파괴된 석굴이 있었던 것 같고 5∼6개소는 굴석(窟石)을 지니고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전실을 마련한 석굴은 층층을 형성하였고 또 전실에는 단청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용 중인 석굴은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승방굴(僧房窟)'로 짐작되고 있다. 이외의 석굴은 많이 파괴되어 일종의 감실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석굴의 앞면에는 대부분 목조전실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석굴 상부에는 양수(兩水)를 돌린 물끊기가 각 굴마다 시설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쪽에는 양 벽에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설치하였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또 석굴이 벽면에는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골굴(骨窟)'이란 대형 글씨가 보이고 굴과 굴을 연결하였던 작은 길에는 회랑을 설치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회랑은 때로는 S자 형태로 전개되기도 하고 또는 계단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주로 기둥을 박았던 자취로서 원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304번지)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양북면 소재 골굴암의 바위산에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마애불로서 높이는 4m가량 되며, 보물 제581호이다. 기림사(祈林寺)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조성한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 骨窟石窟>에는 목조전설이 묘사되어 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가구(架構)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애불은 석질이 고르지 않아 무릎 아래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과 광배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강건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다. 반쯤 뜬 눈은 길게 조각되었고 코는 크지 않으나 뚜렷하게 각이 져서 타원형의 눈썹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사이로 백호공(白毫孔)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중은 짧고 입술은 두꺼운데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으며, 두 귀는 길고 크다.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지만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하여 신체는 평면적이어서 신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인데, 옷주름은 평판(平板)을 겹쳐놓은 듯 두 팔과 가슴/하반신 에서 규칙적인 평형선을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에서는 V자형으로 표현되어 팔과 상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가슴 좌우에는 아래로 처진 옷깃이 보이며 옷깃 사이로 평행 옷주름을 비스듬하게 표현하였다. 유난히 작게 표현된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약지(藥指)와 엄지를 맞댔으며, 오른팔은 손상되었으나 어깨에서 내려오는 윤곽선으로 보아 무릎 위에 얹은 듯하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머리주위에 끝이 뾰쪽한 단판(單瓣)연꽃을 배치하여 두광(頭光) 으로 삼았으며, 두광과 불신(佛身) 사이에는 율동적인 화염문이 음각되어 있다. 대좌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윤곽이 불분명하나 구름무늬 같은 각선의 흔적이 보인다. 이 마애불은 평면 적인 신체와 얇은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양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과 유사하여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후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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