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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칠곡

이세재 불망비(李世載不忘碑)와 남원리 비석군(南元里碑石群)

노촌魯村 2022. 4. 25. 00:05

이세재 불망비(李世載不忘碑.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636-16)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가산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이세재의 선정비.

이세재 불망비는 가산산성의 외성을 축조한 관찰사 이세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 10월에 고을의 백성들이 세웠다.

이 비석은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주민들이 정월 보름날에 제사하는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이세재[1648~1706]의 자는 지숙(持叔), 본관은 용인(龍仁),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이하악(李河岳)의 아들이다.

1669년 사마시에 합격, 1694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을과에 급제하였다. 대간직(臺諫職)과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1698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가산산성 외성을 축조하였다.

1701년 평안도관찰사, 1703년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간·도승지·경기도관찰사·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1706년 사망하였다.

가산산성 외성을 축조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8년 5월에 남북창(南北倉)과 천주사(天住寺)에서 이 비석을 세웠다.

이세재 불망비는 가산산성 진남문 북쪽 150m 정도에 있는 해원정사 뒤에 있다.

이세재 불망비는 비각과 비신, 비좌 등을 갖추고 있다.

비석의 총 높이는 162㎝이며, 비신은 높이 105㎝, 너비 45㎝, 두께 14㎝이다.

1708년에 비석을 세우고 후에 비각을 세웠다.

비석의 앞면 가운데에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豐功至嚴永世不忘碑)’를 새기고 좌우에 비명(碑銘)을 새겨 넣었으며, 그 옆에는 ‘갑술오월 일 남북창 천주사 입(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住寺 立)’의 비석 건립 연대와 건립의 주체를 새기고 있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嚴永世不忘碑 國家柱□ 功高保障 □外干城 澤冾殘氓 卒伍隊整 於□不忘 軍需庫盈 勒石留名 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住寺 立”

가산산성 내에 위치하고, 비각이 건립되어 있어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다.

가산산성의 외성을 축조한 이세재의 행적과 산성 축조와 관련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이세재 불망비는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서 매년 정월 14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남원리 주민들이 금기하고, 보름날 새벽에 제사를 지낸다.

비석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된 예가 흔하지 않으므로 민속학적으로도 상당한 의의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남원리 비석군(南元里碑石群.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636-16)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가산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및 별장의 불망비와 거사비.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가산산성 안 세 곳에는 모두 13기의 관찰사 및 별장의 불망비, 거사비가 있다.

이 중 남원리 이세재불망비는 비각이 있으나 10기의 비석은 비각이 없는 호패형의 비석들이며, 2기는 바위에 비석의 형태를 부조한 마애비이다.

비석의 분포는 가산산성 내 해원정사에 이세재 불망비와 왼쪽 옆으로 6기의 비석들이 있는데 주로 관찰사와 별장들의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들로 비석의 형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가산산성 안 동문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모두 4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관찰사와 별장의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들로 모두 호패형이다.

가산산성 외성 안에 있는 것으로는 모두 2기이다. 이 비석은 자연암벽의 한쪽을 다듬어 비문을 새긴 마애비인데 관찰사와 별장의 공덕을 기리는 것들이다.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는 1708년에 경기도관찰사와 형조참판을 역임한 이세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비각이 있다.

나머지 별장서신갑진심국사비(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 별장서공휘□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 영기관김공성림영세불망비(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 겸순찰사김상공명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관찰사김상국노응영세불망비(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 별장서공휘규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奎賢遺惠不忘碑), 별장김공휘재오영세불망비(別將金公諱在五永世不忘碑), 전별장최공휘백종영세불망비(前別將崔公諱白宗永世不忘碑), 관찰사이상국휘경재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景在永世不忘碑),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는 건립의 경위 등이 분명하지 않다.

남원리 비석군의 비석들은 모두 관찰사와 별장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합심하여 순차적으로 세운 것들이다.

이들 비석이 건립된 장소는 행인이 많은 도로변에 위치하여 공적비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건립의 경위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음은 비석의 건립연대를 정리한 것이나 구체적인 연대를 확인하기 어려워 간지만 제시하였다.

1.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 1708년(숙종 34) 10월에 주민들이 가산산성의 외성을 축조한 이세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2. 별장서신갑진심국사비(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 1708년(숙종 34) 10월 3. 별장서공휘□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 기묘년 4월 4. 영기관김공성림영세불망비(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 건립 연대 불명

5. 겸순찰사김상공명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 병술년 5월

6.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무술년 5월

7. 관찰사김상국노응영세불망비(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 갑술년 5월에 남북창(南北倉)과 천주사에서 비석을 세웠다.

8. 별장서공휘규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奎賢遺惠不忘碑): 기묘년 4월에 성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9. 별장김공휘재오영세불망비(別將金公諱在五永世不忘碑): 경신년 9월 10. 전별장최공휘백종영세불망비(前別將崔公諱白宗永世不忘碑): 계해년 5월

11. 관찰사이상국휘경재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景在永世不忘碑): 계묘년 7월

12.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 경신년 8월 13.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 경신년 8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가산산성 진남문 북쪽 150m 지점에 있는 해원정사와 가산산성 동문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가산산성 외성 안에 있다.

1.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嚴永世不忘碑) 비각 안에 비석이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2㎝, 너비 45㎝, 두께 14㎝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관찰사이상국세재풍공지엄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儼永世不忘碑)’를 새겼으며, 1708년(숙종 34) 고을 백성들이 세웠다는 건립 연대와 경위가 있다.

2. 별장서신갑진심국사비(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 비좌에 비신을 고정하고 있는데 비신의 높이는 103㎝, 너비 42㎝, 두께 10㎝이며, 비좌는 높이 11㎝, 너비 64㎝, 두께 28㎝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별장서신갑진심국사비(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를 새겼으며, ‘무자년십월 일(戊子年十月 日)’의 건립연대가 있다.

3. 별장서공휘□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 비좌 위에 비신을 고정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87㎝, 너비 33㎝, 두께 10㎝이며, 비좌는 높이 20㎝, 너비 50㎝, 두께 35㎝이다. 비신의 앞면 가운데에 세로로 ‘별장서공휘□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를 새겼으며, ‘기묘년사월 일(己卯年四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4. 영기관김공성림영세불망비(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 비좌 위에 비신을 고정하고 있다. 비신은 높이 104㎝, 너비 33㎝, 두께 9㎝이며, 비좌는 높이 23㎝, 너비 125㎝, 두께 53㎝이다. 비신의 앞면 가운데에 세로로 ‘영기관김공성림영세불망비(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를 새겨넣었는데,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5. 겸순찰사김상공명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 비좌·비신·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04㎝, 너비 44㎝, 두께 21㎝이며, 이수의 높이는 55㎝, 너비 57㎝, 두께 24㎝이다. 비좌는 높이 34㎝, 너비 114㎝, 두께 45㎝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겸순찰사김상공명후세난망비(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와 ‘병술오월 일(丙戌五月 日)’의 건립 연대를 새기고 있다.

6.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40㎝, 너비 47㎝, 두께 17㎝이며, 비좌는 높이 11㎝, 너비 85㎝, 두께 50㎝이다. 비신의 앞면 가운데에 세로로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를 새기고 ‘병술육월 일(丙戌六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7. 관찰사김상국노응영세불망비(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55㎝, 너비 55㎝, 두께 24㎝이며, 비좌는 높이 28㎝, 너비 73㎝, 두께 60㎝이다. 비신의 앞면 가운데에 세로로 ‘관찰사김상국노응영세불망비(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를 새기고 ‘갑술오월 일(甲戌五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8. 별장서공휘규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奎賢遺惠不忘碑) 비좌와 비신을 갖춘 호패형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는 92㎝, 너비 34㎝, 두께 10㎝이며, 비좌의 높이는 20㎝, 너비 79㎝, 두께 50㎝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별장서공휘규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奎賢遺惠不忘碑)’를 새기고, ‘기유사월 일(己酉四月 日)’에 성민(城民)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9. 별장김공휘재오영세불망비(別將金公諱在五永世不忘碑) 비좌와 비신을 갖춘 호패형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는 102㎝, 너비 43.5㎝, 두께 12㎝이며, 비좌는 높이 21㎝, 너비 52㎝, 두께 72㎝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별장김공휘재오영세불망비(別將金公諱在五永世不忘碑)’를 새겼으며, ‘경신구월 일(庚申九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10. 전별장최공휘백종영세불망비(前別將崔公諱白宗永世不忘碑) 비좌와 비신을 갖춘 호패형 비석이다. 비신은 높이 91㎝, 너비 43㎝, 두께 9.5㎝이며, 비좌는 높이 15㎝, 너비 83㎝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전별장최공휘백종영세불망비(前別將崔公諱白宗永世不忘碑)’를 새겼으며, ‘계해오월 일(癸亥五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11. 관찰사이상국휘경재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景在永世不忘碑) 비신과 비좌를 갖추고 있는 호패형 비석으로 비신의 가운데 부분이 절단되었다. 부러진 위쪽의 비신의 높이는 76㎝, 너비 44㎝, 두께 11㎝이며, 아랫부분은 높이 40㎝, 너비 45㎝, 두께 5㎝이다. 비좌는 높이 18㎝, 너비 90㎝이다. 비신의 가운데에 세로로 ‘관찰사이상국휘경재영세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景在永世不忘碑)’를 새겼고, ‘계묘칠월 일(癸卯七月 日)’의 건립 연대가 있다.

12.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와 함께 있는데, 자연 암반의 한 면을 다듬어 비석의 형태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넣은 마애비이다. 비좌의 형태는 만들지 않았으나 위쪽을 둥글게 마무리한 호패형이다. 비신의 가운데 부분에 세로로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를 새겨 넣었으며,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의 옆에 ‘경신팔월 일(庚申八月 日)’의 건립 연대와 비석의 제작 과정과 감독자 등을 새겨 넣었다.

13.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와 함께 있는데, 자연 암반의 한 면을 다듬어 비석의 형태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넣은 마애비이다. 비좌의 형태는 만들지 않았으나 위쪽에 무늬를 넣은 가첨의 형태를 만들어 비석을 장식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비신의 가운데 부분에 세로로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를 새겨 넣었으며, 옆에 ‘경신팔월 일(庚申八月 日)’의 건립 연대와 비석의 제작 과정과 감독자 등을 새겨 넣었다.

[금석문]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에 비문이 있으나 마모되어 거의 읽을 수 없으며, 나머지는 비문이 없거나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별장서지한영세불망비(別將徐志翰永世不忘碑), 관찰사홍상국우길거사비(觀察使洪相國佑吉去思碑), 별장서공휘규현유혜불망비(別將徐公諱奎賢遺惠不忘碑), 관찰사남상국유혜비(觀察使南相國遺惠碑), 별장김공휘재오영세불망비(別將金公諱在五永世不忘碑)는 비명의 마모로 판독이 곤란하다.

 

"觀察使李相國世載豊功至嚴永世不忘碑

國家柱□ 功高保障 □外干城 澤冾殘氓 卒伍隊整 於□不忘 軍需庫盈 勒石留名"

"別將徐信甲盡心國事碑

戊子十月 日立"

"別將徐公諱□道遺惠不忘碑

蒞玆一□ 捐金誌□ □□逢□ □□□仁 賑施荒□ 如山其德 安隼流□ 鐫彼貞玟

城內居民 己卯四月 日立"

"營紀官金公聖林永世不忘碑

南□之化 四十省結 金□之功 □五□釼 旬務□□ 靑□已畢 □□□□ 黃口未宗"

"兼巡察使金相公溟後世難忘碑

廣德施惠 千秋永傳

丙戌五月 日 南北倉民 天柱寺僧等立"

"觀察使金相國魯應永世不忘碑

□波棠蔭 益受字恤 一路之石 井隊關□ 民阮飽惠 石而臺焉 緇□涵德 永世無泐

甲戌五月 日 南北倉 天柱寺 立"

"前別將崔公諱白宗永世不忘碑

壬申創設(마모) 助劃給料米布(마모)"

"觀察使李相國諱景在永世不忘碑

常平漢含 □運梁□ 民所瞻望 銘心刻銘 □聲樹棠 鴻□流亡 □□□處

癸卯七月 日 東北面立"

 

비신의 가운데가 부러져 보수된 일부 비석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잘 관리되어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그러나 비문은 이미 상당 부분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칠곡도호부 치소였던 가산산성과 관련된 장수들과 관찰사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들로 지역의 주민들이 건립하였으며, 공식적인 국가 기록에 누락되어 있는 인물 자료를 제공해 준 것에 의의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