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낭산, 도리천 가는길」 특별전 공동 개최
- 국립경주박물관·(재)성림문화재연구원 / 2022.6.15. ~ 9.12.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배)는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최선주),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과 함께 2022년 6월 15일(수)부터 9월 12일(월)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낭산, 도리천 가는 길」 특별전을 공동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신라인이 각별하게 여긴 경주 낭산과 낭산에 분포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이들이 가지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다. 전시는 ▲ ‘낭산으로의 초대’(프롤로그) ▲ Ⅰ부 ‘신들이 노닐던 세계’ ▲ Ⅱ부 ‘왕들이 잠든 세상’ ▲ Ⅲ부 ‘소망과 포용의 공간’ ▲‘전시를 마치며’(에필로그) 등 5개의 주제로 구성했다.
먼저, ▲ ‘낭산으로의 초대’(프롤로그)에서는 신라 왕경 중 낭산의 위치와 낭산에 있는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 Ⅰ부 ‘신들이 노닐던 세계’에서는 사천왕사와 전(傳)황복사 등 낭산의 사찰에서 다양한 신장상(神將像)이 만들어진 배경을 소개한다. 토착 신앙의 성지이던 낭산이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공간으로 변하긴 했지만,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과 국가를 지켜준다는 상징성만큼은 그대로 이어진 배경을 담았다.
* 신장상(神將像) : 사찰이나 부처를 수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칼이나 창을 들어 무장한 신상
▲ Ⅱ부 ‘왕들이 잠든 세상’은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낭산 일대가 신라왕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과정에서 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소개한다. 1942년 전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수습된 사리 장엄구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데, 국보로 지정된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한 사리 장엄구가 세상에 나온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일괄 전시되어 이번 특별전의 의미를 더한다.
▲ Ⅲ부 ‘소망과 포용의 공간’에서는 낭산이 국가와 왕실의 안녕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던 공간으로 성격이 확장되었음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국립경주박물관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능지탑에서 발굴된 문화유산을 한 자리에 선보인다. 능지탑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벽전(甓塼)과 상륜부 장식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낭산 서쪽 자락에서 발견되었다가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은 십일면관음보살상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약사불상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는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하던 신라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벽전(甓塼) : 벽면이나 기단 면을 장식하는 전돌
▲ ‘전시를 마치며’(에필로그)에서는 사역(寺域)의 대부분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명칭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전 황복사의 사례를 소개하며, 낭산의 문화유산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번 특별전은 그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던 경주 낭산과 그 문화유산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전시를 개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낭산의 문화유산과 그 역사 속 이야기들이 국민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낭산’ 관련 역사 이야기
'삼국유사'에는 경주 낭산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은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자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당황했고,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일러주었다. 불경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하였고, 문무왕 19년(679)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가 세워지자 신라인들은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사천왕천: 불교의 우주관에서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으며, 사천왕이 주재함
* 도리천: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주재함
신라인들에게 수미산으로 여겨진 경주 낭산은 토착 신앙의 성지였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곳은 원래 신들이 노니는 숲인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다. 413년 누각 형태의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났고 향기가 가득 퍼져 없어지지 않자, 당시 실성 이사금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스러운 땅”이라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령스러움 때문에 낭산은 중요한 제장(祭場)으로 사용되었으며, 신라의 중요한 명산대천(名山大川) 가운데 으뜸인 삼산(三山)의 하나로 대사(大祀)가 거행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낭산은 사천왕사와 망덕사, 전 황복사 등 불교 유적이 강조되면서 토착 신앙 및 신라의 국가 제장으로서의 면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 ‘낭산으로의 초대’(프롤로그) : 신라 왕경 중 낭산의 위치와 낭산에 있는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공간
▲ Ⅰ부 ‘신들이 노닐던 세계’
사천왕사와 전(傳)황복사 등 낭산의 사찰에서 다양한 신장상(神將像)이 만들어진 배경을 소개한다. 토착 신앙의 성지이던 낭산이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공간으로 변하긴 했지만,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과 국가를 지켜준다는 상징성만큼은 그대로 이어진 배경을 담았다.
전 황복사 금당 터의 기단 앞쪽에서 출토되었다. 어깨, 팔, 다리에서 갑옷 형태가 확인되는 무장武將한 모습의 신장상이다. 부채꼴로 펼쳐진 사실적인 옷주름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생동감 있게 표현된 옷자락 등 당장이라도 돌에서 걸어나올 것처럼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전 황복사 터에서 수습된 십이지의 개상 상부 조각이다. 전 황복사 금당 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상부가 파손된 십이지가 1구 확인되었다. 따라서 개상은 원래 전 황복사의 금당 기단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능지탑의 기단부 를 구성하였던 면석面石으로, 십이지가 새겨져 있다. 갑옷을 입고 칼을 쥔 무장武將의 모습을 개겼는데, 상부가 파손되어 십이지 가운데 어떤 동물인지 분명하지 않다.
Ⅱ부 ‘왕들이 잠든 세상’ :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낭산 일대가 신라왕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과정에서 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건립되었음을 소개한다. 1942년 전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수습된 사리 장엄구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데, 국보로 지정된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한 사리 장엄구가 세상에 나온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일괄 전시되어 이번 특별전의 의미를 더한다.
일제 강점기에 오사카 긴타로 大板金太郞가 발견한 비편으로, '서書' 등이 새겨져 있다. 문무왕비의 2-3행 하단부의 끝으로 밝혀졌다.
오른손을 들어 두려움을 없애주고, 왼손을 내려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손갖춤을 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광배를 껒았던 촉이 남아 있다.
관음보살로 추정되며, 삼면 형식의 보관을 썼고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함께 왼손에 물을 담는 병을 쥐고 있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국보.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과 함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양감이 있고 자비롭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국보.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Ⅲ부 ‘소망과 포용의 공간’
낭산이 국가와 왕실의 안녕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던 공간으로 성격이 확장되었음을 소개한다. 이를 위해 국립경주박물관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능지탑에서 발굴된 문화유산을 한 자리에 선보인다. 능지탑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벽전(甓塼)과 상륜부 장식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낭산 서쪽 자락에서 발견되었다가 국립경주박물관에 남은 십일면관음보살상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약사불상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는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하던 신라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벽전(甓塼) : 벽면이나 기단 면을 장식하는 전돌
‘전시를 마치며’(에필로그) :
사역(寺域)의 대부분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명칭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전 황복사의 사례를 소개하며, 낭산의 문화유산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번 특별전은 그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던 경주 낭산과 그 문화유산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전시를 개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낭산의 문화유산과 그 역사 속 이야기들이 국민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전 황복사의 명칭 관련 논란
일제 강점기에 낭산 동쪽에서 수습된 '황복사皇福寺'가 새겨진 기와 편과 1966년 전 황복사 일대에서 출토된 '황복皇福'이 새겨진 기와 편 때문에 이 절터는 황복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사역寺域의 대부분을 발굴 조사했음에도 황복사임을 알려주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백사仁伯寺'와 '선원사禪院寺'가 새겨진 기와만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이곳이 과연 황복사皇福寺가 맞는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낭산’ 관련 역사 이야기
'삼국유사'에는 경주 낭산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은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자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당황했고,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일러주었다. 불경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하였고, 문무왕 19년(679)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가 세워지자 신라인들은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사천왕천: 불교의 우주관에서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으며, 사천왕이 주재함
* 도리천: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주재함
신라인들에게 수미산으로 여겨진 경주 낭산은 토착 신앙의 성지였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곳은 원래 신들이 노니는 숲인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다. 413년 누각 형태의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났고 향기가 가득 퍼져 없어지지 않자, 당시 실성 이사금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스러운 땅”이라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령스러움 때문에 낭산은 중요한 제장(祭場)으로 사용되었으며, 신라의 중요한 명산대천(名山大川) 가운데 으뜸인 삼산(三山)의 하나로 대사(大祀)가 거행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낭산은 사천왕사와 망덕사, 전 황복사 등 불교 유적이 강조되면서 토착 신앙 및 신라의 국가 제장으로서의 면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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