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는 27대 선덕여왕 때인 643년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이름은 ‘임정사’였는데 원효대사가 와서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31대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해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대한 사찰이었다.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가 되었지만, 비로자나 삼신불이 봉안된 대적광전(보물제 833호)과 약사전,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진남루 등 귀한 유산을 품고 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이다. 보문 415호인 대적광전은 조선 초기 불상의 전형을 갖추고 있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그 바로 앞에 높이 3m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 있다.
배흘림 양식으로 세워진 탑은 처마 끝은 살짝 들리어 가뿐한 느낌을 주고, 위로 갈수록 줄어들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대적광전을 마주보고 좌측계단에 오르면 삼천불전이 있다.
삼천개의 하얀 불상이 본존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한 눈에 들어오기 힘들만큼 웅장하다.
기림사에서는 산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계절별 테마로 구성되는데 봄에는 녹차 따는 과정에서부터 차 만드는 과정까지 체험해보고 여름에는 용연폭포에서 명상의 길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가을에는 연밭을 감상하며 연차를 시음할 수 있고 산사음악회 공연도 볼 수 있다. 겨울에는 동지, 제야의 타종식과 함께 동해의 해맞이도 볼 수 있으며 그 밖에 만다라 그리기, 마하사 여름수련회,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도 체험해 볼 수 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사찰이기도 하다.
기림사진남루(祇林寺鎭南樓.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기림사는 함월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세웠다. 기림사란 이름은 부처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진남루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출처 : 문화재청)
기림사응진전(祇林寺應眞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기림사는 선덕여왕 12년(643)에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세웠으며, 이름은 부처님이 살아있을 때에 세웠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응진전은 기림사 내에 있는 건물로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로 단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을 볼 때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18세기 이후)의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기림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 양식을 따른 비교적 완전한 석탑이다.
현재 하층 기단은 갑석부터 남아 있고, 상대 중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탱주 한 개씩을 모각하고 있으며, 그 위에 놓여 있는 상대 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있다. 또한 갑석의 상면에는 4단으로 된 층급받침이 있다. 그리고 각 탑신석에는 상대 중석면에 모각한 모서리기둥과 같은 것이 있다.
초층의 옥개석은 장대하고 4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다. 2.3층의 옥개석 역시 4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으며, 체감률이 고르다. 탑 전체가 고준한 감이 엿보인다. 또한 옥개석의 추녀는 낙수면이 완만하며 전각이 역간 반전되어 있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이다.(문화재안내문에서)
기림사약사전(祇林寺藥師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대적광전(大寂光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重建記)에는 조선 효종(孝宗) 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肅宗) 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 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通例)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慶州 祇林寺 大寂光殿. 보물. 경북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437-17, 기림사 (호암리))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인도의 스님 광유가 세워 임정사라 불렀고, 그 뒤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은 천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慶州 祇林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기림로 437-17 (양북면, 기림사))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삼불회도(慶州 祇林寺 毘盧遮那三佛會圖.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기림로 437-17 (양북면))
이 불화는 기림사 대적광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삼불회도로서, 중앙에 비로자나불회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회도가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조성된 삼불회도는 석가모니불화(중앙)·약사불화(좌)·아미타불화(우)로 구성된 삼세불화와 비로자나불화(중앙)·노사나불화(좌)·석가모니불화(우)로 구성된 삼신불화가 일반적이지만 이 불화에서는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이루어져 있어 삼세불화와 삼신불화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 남송대부터 나타난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 16세기 불상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지만, 불화 중에서 기림사 불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하기 때문에 자료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 삼불회도는 전반적으로 한 화면에 많은 존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중앙의 주불을 중심으로 점차 화면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상승하면서 높은 존격에서 낮은 존격으로 배치하고, 인물의 표현도 점점 작아지게 하여 화면에서 원근감과 입체적인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색채에서 후대에 일부 개채의 흔적이 보이지만, 황토색의 바탕에 홍색·녹색·노란색·하늘색·초록색 등이 적적하게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화는 천오(天悟)·금명(錦明)·최훈(最熏)·적조(寂照)·지순(智淳)·조한(祖閑)·임한(任閑) 등의 화원이 참여하여 1718년(숙종 44)에 그렸는데, 천오와 임한은 18세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로 기림사 불화의 진가를 짐작케 한다.(출처 : 문화재청)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 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기림로 437-17 (양북면, 기림사))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는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의 기림사에 모셔진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당당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출처 :문화재청)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다. 매월당은 경주 남산 용장골에 조그만 산실을 짓고 7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에 사당이 있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을 봉인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금령에 의해 훼절되니, 고종15년(1878)에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다.
최근(1996)에 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유림의 요청으로 경주시가 시비를 들여 절 담장 안에 새로 사당을 지었으며,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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