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기타/각종정보

『봉화 청암정(奉化 靑巖亭)』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노촌魯村 2022. 8. 26. 11:41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비지정문화재인 「봉화 청암정(奉化 靑巖亭)」, 「영주 부석사 안양루(榮州 浮石寺 安養樓)」,「영주 부석사 범종각(榮州 浮石寺 梵鐘閣)」 등 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하고, 경상북도 영천시에 위치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봉화 청암정(경상북도 봉화군)은 안동권씨 충재종택 경역 내에 위치한 정자로, 인근에 위치한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암정기(靑巖亭記, 작성연대 1682년)」, 「선생수서목편식(先生手書木片識, 작성연대 1724년)」등의 역사 문헌에 1526년 충재 권벌이 살림집의 서쪽에 세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16세기 사대부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적인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을 위한 개인 거처를 집 주변이나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에 정자 형태로 짓는 방식을 가거(家居)라 일컬었는데,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사대부 주거문화를 선도한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이곳은 안동 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의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되는 등 오랜 기간 역사적 자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 장수 : 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
* 유식 : 몸과 마음을 쉬면서도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

  봉화 청암정은 연못 한가운데 놓인 거북형태의 바위라는 한정된 공간과 바닥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궁궐식의 높은 기단을 세우고, 바닥을 채워 마루와 온돌을 놓았는데,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는 ‘丁’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 또한 창문을 비롯한 주요 구조는 17세기 이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정자건축으로서,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기단 :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

  

 
  영주 부석사 안양루(경상북도 영주시)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문루이다.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 문루 : 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
* 다포계 :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
* 팔작지붕 : 전후좌우 네 면에 지붕이 있고, 좌우면에 작은 박공이 만들어지는 지붕 형태

  『계암일록(溪巖日錄, 작성연대 1615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 작성연대 1644년)」 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기존에 있던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1555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1576년에 현재의 ‘안양루’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 계암일록 : 조선 중기 문신인 김령(金坽, 1577∼1614)의 문집

  안양루는, ▲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도록 배치한 점, ▲ 누마루 아래로 진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 공포와 대들보의 구성 등에 조선 중기 또는 그보다 이전에 사용된 오래된 기법이 남아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사찰 문루 건축으로서,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경상북도 영주시)도 영주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이다.
* 종각 : 큰 종을 달아 두는 누각

  범종각은 『계암일록(작성연대 1615년)』, 「부석사기(작성연대 1651년)」등의 문헌자료에 ‘종루(鍾樓)’, ‘종각(鐘閣)’ 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부석사 종각 중수기(작성연대 1746년)」에 따르면, 1746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인 1747년에 중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청량산유록(淸涼山遊錄, 작성연대 1780년)」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이후 해당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중건 : 절이나 궁궐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 일반적으로 종각이 사찰 좌우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사찰의 진입 중심축에 위치한 점, ▲ 아래층 가운데 칸을 지나 계단을 거쳐 안양루로 통하는 형식인 점, ▲ 지붕의 포와 포 사이에 놓여 무게를 받치는 부재인 화반을 덩굴나무 모양의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점, ▲ 지붕 내부에 범종각 재건 당시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충분한 사찰 종각 건축으로서, 보물로 지정될 만 하다고 판단된다.
* 단청 : 대궐이나 절 등의 벽·기둥·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린 그림이나 무늬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봉화 청암정」,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범종각」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는『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대왕이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1521년(중종 16)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으며,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과 1546년(명종 1) 가봉(加封) 때 세운 비석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재위 기간이 짧아 곧바로 가봉하지 못하였다.
* 가봉(加封):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 태실의 위엄을 더하기 위해 격식을 높이는 것
*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임금, 재위기간 1544년 11월 28일∼1545년 8월 3일(음력, 9개월)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 정상부에 비교적 넓게 형성된 편평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 의궤에 묘사된 격식에 따라 전체 평면은 8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태가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동석(中童石)을 놓았다.
비신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인종대왕태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가정25년(1546년)5월일건]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 중동석(中童石): 태실 조성시 사용된 사각 받침석 위에 올린 동그란 돌

  인종대왕 태실은, ▲ 1680년에 파손된 부분을 수리해 1711년에 태실비가 재건되면서 태실로서의 격식을 되찾았고, ▲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후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 1999년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원형을 회복하였다.
* 태지석(胎誌石) : 태의 주인에 대한 인적사항이나 태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돌이나 도판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 의궤에 따른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태실의 규모가 크고 석물을 다듬은 기법이 우수하다. 또한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 태실은 가봉된 이후 파손된 적도 있었으나, 처음 설치되었던 원 위치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인종대왕 태실은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석물 :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운부암. 중암암. 은해사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은해사.운부암.중암암 삼거리(신일지 못뚝. 인종태실 이정표(안내판))에서 인종태실 가는 길.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인종태실 올라가는 길
인종의 태실은 산중돌혈(突穴)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선의 왕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조성됐다

 

복원전 귀부 모습(문화재청 사진)

 

복원전 이수 모습(문화재청 사진)
복원 후 남은 석재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이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될 수 있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할 계획이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봉화 청암정(奉化 靑巖亭)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ㅇ 소유자(관리자): 안동권씨 충정공파문중(안동권씨 충정공파문중)

ㅇ 구조/형식: 목구조 / 5량가 / 누정

ㅇ 건립시기: 조선 시대(16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02.24㎡(명승 청암정과 석천계곡 내)

□ 지정사유

봉화 청암정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동권씨 충재종택 경역 내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로, 인근에 위치한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봉화 청암정은 「청암정기(靑巖亭記, 작성연대 1682년)」, 「선생수서목편식(先生手書木片識, 작성연대 1724년)」등의 역사 문헌에 1526년 충재 권벌이 살림집의 서쪽에 건립한 사실이 기록된 정자로, 창건 당시 마루로 된 6칸 규모의 건물로 건립되었으며, 16세기 말에 2칸 규모의 온돌이 추가되었다. 이후 1721년 동측면 기둥 3개를 교체하고, 북쪽 처마와 덧서까래를 고쳤으며, 난간과 기와를 모두 바꾸고 단청을 했다.

16세기 사대부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적인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을 위한 개인 거처를 집 주변이나 명승지에 정자 형태로 짓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가거(家居)라 하였다.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사대부의 가거적(家居的) 주거문화를 선도한 대표적 사례이며, 안동 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되는 등 오랜 기간 역사적 자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봉화 청암정은 연못 한가운데 놓인 거북형태의 바위라는 한정된 공간과 바닥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궁궐식의 높은 기단을 세우고, 바닥을 채워 마루와 온돌을 놓았으며,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는 ‘丁’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창문틀의 중간에 설주를 세우는 고식(古式)의 영쌍창(欞雙窓)이 남아 있으며, 대들보 머리가 주심도리 하단에서 끝나고 익공부재로 외목도리를 지지하는 출목익공의 구성방식은 임진왜란 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예천 야옹정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청암정이 17세기 이전의 건축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봉화 청암정은 1526년에 창건된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丁’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건축으로, 16세기 사대부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사례이다. 또한 자연 암반 위에 높은 기단을 쌓아 마루와 온돌을 구성하였으며, 영쌍창과 익공의 건축적 특징은 청암정이 17세기 이전에 건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자 건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영주 부석사 안양루(榮州 浮石寺 安養樓)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ㅇ 구조/형식: 목구조 / 5량가 / 문루

ㅇ 건립시기: 조선 시대(16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85.31㎡

□ 지정사유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문루로,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계암일록(溪巖日錄, 작성연대 1615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 작성연대 1644년)」, 「무량수전 안양루 중수기(無量壽殿 安養樓 重修記, 작성연대 1723년)」 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원래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있었으나, 1555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1576년에 중층 문루인 ‘안양루’를 그 자리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전체 사찰배치에서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게 하고 있어, 무량수전 영역의 종교적 경외감과 조망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무량수전으로 통하는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어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간포는 주심포 사이에 각 1개씩 배치되어 있다. 공포는 외부와 내부의 모습이 다른데, 외부의 살미는 길이가 짧으면서 끝을 직절한 쇠서형태로 된 반면, 내부는 교두형으로 첨차와 동일한 형태로 처리되어 있고, 첨차에는 조선 중기 이전에 나타나는 공안(栱眼)의 수법이 남아 있다. 또한 대들보 위에는 화반형 동자대공, 첨차, 소로로 구성된 포대공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있으며, 충량 위에는 복화반 형태 동자주와 화반형 동자주를 직교하여 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조선 중기 또는 그 이전에 사용된 오래된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1576년에 창건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찰 문루 건축이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 사찰 문루 건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영주 부석사 범종각(榮州 浮石寺 梵鐘閣)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6

ㅇ 소유자(관리자):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ㅇ 구조/형식: 목구조 / 5량가 / 종각

ㅇ 건립시기: 조선 시대(18세기)

ㅇ 수 량: 1동

ㅇ 지정면적: 131.0415㎡

□ 지정사유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이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계암일록(작성연대 1615년)』, 「부석사기(오두인, 작성연대 1651년)」등의 문헌자료에는 ‘종루(鍾樓)’, ‘종각(鐘閣)’ 으로 표기된 건물이 있었으나, 「부석사 종각 중수기(작성연대 1746년)」에 따르면, ‘범종각’은 174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747년에 중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청량산유록(淸涼山遊錄, 작성연대 1780년)」등의 문헌자료에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이후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종각은 보통 사찰의 좌우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사찰의 진입 중심축선에 위치함과 동시에 아래층은 출입을 겸하고 있다. 특히 정면보다 측면의 칸 수가 많아, 아래층의 가운데 칸은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을 계기로 진입축이 엇갈리게 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측면이 길며, 정면쪽 지붕은 팔작지붕, 후면쪽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안양루로 통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형식을 갖고 있는데, 아래층의 기둥은 바깥면에 위치한 기둥이 안쪽에 위치한 기둥보다 굵다.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내부에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을 두고 있다. 공포는 전면과 좌우 측면의 경우 1출목 2익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살미(山彌)의 외부는 앙서(仰舌)형의 초익공과 수서(垂舌)형의 이익공으로 되어 있고, 포와 포 사이에는 화반을 둔 반면, 후면은 간략한 초익공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화반은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초각 수법은 18세기 중반의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후면을 맞배지붕으로 하되 풍판(風板)을 두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범종각 중창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1747년에 중창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보다 측면의 길이가 길며, 전후 지붕 형태가 다르고, 화려한 초각 기법과 함께 18세기 중엽의 단청이 남아 있는 18세기의 사찰 종각 건축이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 사찰 종각 건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

□ 지정내용

ㅇ 지정현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현 영천치일리인종태실)

ㅇ 명 칭: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

ㅇ 소유자(관리자): 영천시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번지

ㅇ 조성연대: 조선시대

ㅇ 구성형태: 태실 1기, 가봉비 1기, 기타 석재

ㅇ 지정면적: 40.74㎡(태실 38.37㎡, 비 2.37㎡)

ㅇ 구조/형식/형태: 석조/석실/석함 및 비석

ㅇ 재 질: 석재(화강암)

□ 지정사유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왕실이 태를 봉송(奉送)하여 태실에 봉안하는 의례에 따라 1521년(中宗 16)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6년(明宗 1)에 가봉(加封)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680년(肅宗 6)에 개수되었고, 1711년(肅宗 37) 태실비에 대한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전국에 소재한 54개소의 태실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서삼릉으로 이안하고 석물을 폐기하면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의 태항아리도 1928년 서삼릉으로 이안되었다. 이후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99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현재는 태실 1기, 비 1기 및 기타 석물로 이루어져 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위에서 볼 때 8각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 난간석을 두고 중앙에 태가 안치된 승탑(僧塔)형태의 중동석(中童石)이 놓여 있다. 중동석은 연화문(蓮花紋)으로 장식된 네모난 큰 돌 위에 놓여 있으며, 중동석 위에는 두툼한 처마를 지닌 옥개석 형태의 개첨석(蓋檐石)을 얹었다. 개첨석 위에는 연주문(蓮珠紋)이 2단으로 장식된 보주(寶珠)를 올렸다. 중동석 주변으로는 여러 매의 방사형(放射形) 석재를 놓아 8각형의 평면을 구성하고, 바깥 주변으로 석조 난간을 둘렀다. 전면에 위치한 가봉비(加封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1546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영기법과 구조 등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의 내용에 부합된다. 또한 태실과 태실비의 전체적인 조영기법이 우수하며, 태실을 구성하는 석물의 세부 치석이나 장식기법이 정연하고, 문양과 조각 기법이 우수하여,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처음 설치된 이후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과 입지 등은 원래의 조영 의도와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또한 태(胎)를 안치하는 당대의 문화적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가운데 규모가 크고, 문화유산으로서 지녀야할 보편적 가치와 함께, 완전성과 진정성도 구비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