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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수산제 수문(密陽 守山提 水門)

노촌魯村 2022. 10. 13. 04:49

밀양 수산제 수문(密陽 守山提 水門. 경상남도 기념물.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63번지)

수산제는 경남 밀양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로서 원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세종실록지리지』·『신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후대에도 여러 번 제방을 고쳐 쌓은 기록이 나타나는데, 임진왜란(1592)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28년까지 황토흙으로 된 제방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이 범람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양수와 배수를 위해 수산리 산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힌 채 지금도 남아있다.(출처 : 문화제청)

 

수산제는 원삼국시대부터 있어온 벼농사를 위해 축조된 관개용 저 수지이며, 제방의 길이는 728보이고 둘레가 20리가 되며 벽골제, 의 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 (屬縣)이었던 수산현이며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 귀명리 지역과 초 동면의 검암리, 금포리에 걸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을 보면 후대에도 계속 제방을 수축한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화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 본인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 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 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 江)이 범람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고 배수를 위하여 수 산리 산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 의 흔적이 지금도 조금 남아 있다.(참고자료 : 경성대학교 박물관, 1989, <<가야문화권유적정밀조사보고)

 

수산제(守山堤)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471-4번지를 기점으로 하여 동북쪽으로 수산리 931번지 도연산(道淵山) 부근에 이르는 약 1km에 달하는 고대 삼한시대에 축조된 향토로 만들어진 제방으로 국농소(國農所)에 범람(氾濫)하던 용진강(龍津江 : 일명 海陽江) 물을 막아주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전북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충북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農耕文化遺蹟)으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밀양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서 "미리(彌離)는 용(龍) 즉 크다(大)는 뜻이고, "미동(彌凍)"은 모탁(牟 )이나 미동(未冬)등과 함께 물둑, 물동 제방(堤防) 등으로 일컬어서 물과 관계되는 크다란 제방(大堤 : 守山堤)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수산제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가 형성되었다가 점차 지금의 밀양시 소재지 방면으로 그 중심권이 이동된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되고, 자연스럽게 수산제의 축조연대 또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수산제 주변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패총(貝塚), 지석묘(支石墓) 등과 함께 수많은 토기(土器)들이 출토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중요한 것은 1986년 11월 24일 하남읍 수산리 972번지 지하 자연암반에서 수문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수산제 수문(水門)인 것이다. 이 수문은 AD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의 입석수문(立石水門)보다 더 원시적으로 자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것이 고증(考證)되어 축조년대가 국내 최최(最初)임이 입증된 바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의 기록을 보면 수산제의 길이가 728보(步)로 되어 있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040m에 달하고 수산제에 포함되었던 이 수문은 높이 181cm, 너비 152cm, 길이 25m, 연결수로 7m의 규모이다.

수산제의 변천과정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證東國與地勝覽)』,『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점필제집( 畢齊集)』,『밀주구지(密州舊誌)』등에서 살펴 볼 수가 있는데 고려 충렬왕 원년(1274년)에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사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이곳에서 제방을 고쳐 쌓고 군량미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도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농정(國農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신수리시설(新水利施設)을 하기전까지는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수산제가 일본인들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어 버렸는데, 최근들어 밀양시 당국에서 발굴 조사작업을 거쳐 옛제방(守山堤)의 일부를 복원하고, 전시관, 수구보호각, 미니저수지, 경작체험답, 야외전시시설, 야외공연장, 주차장, 휴게실, 화장실, 안내판 등을 설치하여 학습장으로 활용코져 열심히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출처 : 밀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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