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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영지사(靈芝寺.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용호리 14])

노촌魯村 2023. 2. 1. 20:24

영지사(靈芝寺.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용호리 14])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구룡산(九龍山)에 있는 사찰. 영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영지사는 신라 무열왕[재위 654~661] 때 의상(義湘)이  웅정암(熊井庵)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 다시 중창하면서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1774년(영조 50) 중수가 있었고, 1992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조선 전기의 사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3년 지조(智照)와 원찬(元贊)이 중창하였다. 이때 절 이름을 현재의 영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임자갑 유공비(壬子甲有功碑)에 의하면 1774년에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비구니 중안(重岸)이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영지사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범종각, 산신각 등의 불전이 자리하고 요사채가 2동 있다. 대웅전 앞에 삼층 석탑이 있고, 역대 주지들의 부도가 전해진다.

  영지사 대웅전 및 범종각은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7호로 함께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부전은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요사채는 ㄱ자형 팔작지붕이다.

  사찰의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내부에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삼층 석탑과 역대 주지들의 부도가 전해진다.

  대웅전 앞에 있는 소형 삼층 석탑은 본래 대창면 탑마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이전할 때 기단부를 잃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지사 범종각(靈芝寺梵鐘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

  범종각은 대웅전 영역보다 한 단 낮은 경내 입구에 위치하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구조는 중층 누각에 익공계 팔작집이다.

  상·하층은 벽 없이 사방이 트여 있고, 대웅전 앞 중정에서 진입할 수 있게 후면 어칸에 통로를 내어 출입하고 있다.

  현재 범종각 좌우[좌측은 계단, 우측은 경사로]로는 대웅전 영역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있다.

  상층에는 사방으로 계자각헌함을 돌리고 내부 바닥에 우물마루를 깐 뒤 사물[법고·운판·목어·법종]을 걸었다.

  구조는 두벌대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상·하층에 별주의 두리기둥으로 세운 다음 주상부에는 창방과 이익공으로 꾸몄다.

  각 주간 사이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화반 1구씩을 배치했고, 상부가구는 5량가이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겹처마 팔작집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본래 대창면 탑마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이전할 때 기단부를 잃었다.
영지사 대웅전

영천 영지사 대웅전(永川靈芝寺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

  대웅전은 경내 요사채와 심검당 사이의 북쪽에 위치하며 건물은 사역 북쪽의 산사면에 바짝 붙여 자연석 기단을 높게 축조한 곳에 정면 3칸[220×285×220㎜], 측면 2칸[220×220㎜]에 다포계 팔작집을 남향으로 배치했다.

  간살은 정면 어칸이 양 협칸보다 2척(尺)가량 넓게 설정했고, 양 측면은 동일하다.

  작은 규모임에도 팔작지붕으로 꾸민 점은 주 불전의 위상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자연석 초석 위에 10개의 두리기둥을 세운 뒤 창호와 벽체로 마감했고, 창호는 전면 각 칸과 양 측면에 두었다. 특히 양 측면 창호 위치는 좌측면의 경우는 앞칸에, 우측면은 뒷칸에 각기 설치되어 있다.

  전면 창호는 어칸에 화려한 쌍여닫이 굽널 꽃살문, 양 협칸에는 솟을살문을 달았다. 양 측면의 창호는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꾸미고, 뒷벽 각 칸마다 불단을 설치하고 불상을 안치했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계 공포로 꾸몄다.

  주간포는 어칸만 2조씩, 그 외는 1조씩 배열했다. 주간포의 배열에서 주목되는 점은 어칸의 2조는 등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양 협칸은 공간포 1조를 우주쪽으로 각기 편재해 배열한 것이다. 이런 공간포의 편재된 배치는 양 측면 각 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제공 형태의 외단은 1-3제공까지 전·양 측면으로 앙서와 연꽃조각, 후면은 앙서와 당초조각이고, 4제공은 전·양측·후면에 수서와 연봉조각, 5제공은 전면 어칸 주상에는 용두, 기타는 봉두로 장식했다.  내단은 1제공부터 4제공까지 당초문을 조각해 장식했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것은 내부 상부가구이다. 전·후면 3제공 위에 대량을 걸고 양측면 중앙 기둥상에는 대량과 직교하는 충량을 각기 걸어 결구했다. 그리고 대량 및 충량 위에 우물 ‘정(井)’자로 평방형 부재를 걸고, 그 위에 2출목의 공포를 꾸며 종량을 받치고 있다. 즉 대량과 충량 위에 평방형 부재를 왕찌로 짜고 외 2출목의 공포를 꾸며 중대공을 대신함과 동시에 내부 상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켰다.

  공포 구성은 평방형 부재의 네 모서리 왕찌 위에 4개, 전·후면 각 4개, 양 측면 충량 직상에 각 2개씩 총 14개이다. 특히 우물 ‘정(井)’자형 왕찌 상부에 놓인 공포는 우주상의 전각포와 한 몸으로 이어지도록 주두를 45도 방향으로 배치해서 맞추었다.

  우리나라 다포계 팔작집 중에 충량없이 대량 위에 평방형 부재를 올리고 그 위에 재차 공포를 꾸며 종량 및 상부가구를 받도록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특이한 구조 수법은 운문사 대웅보전이나 관룡사 대웅전 등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의 주불전에서 소수 보인다.

  영지사 대웅전 역시 전통적인 가구 수법을 토대로 새로운 창의적인 구조 기법을 구사한 장인과 그것을 용인한 당시의 사회적 현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고, 네 모서리에는 활주로 받쳤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웅전 측면
영지사 대웅전 불상

영천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永川靈芝寺大雄殿後佛幀畵.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영천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대웅전 내 상단탱화로 봉안된 석가모니 후불도이다. 하단 화기에 ‘건륭 41년(乾隆四十一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1776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영천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세로 209.1㎝, 가로 207.7㎝ 크기이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 협시보살과 4명의 제자로 구성된 칠존도 형식의 간략한 후불탱화이다. 그림 속 권속의 수는 다른 영산회상도에 비해 많이 줄었다.

  낮은 수미단 위에 연화 대좌에 앉아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두고 불단 전면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좌우 협시를 배치하고, 신광 뒤쪽의 구름무늬 사이로 가섭과 아난존자 등 제자 4위를 배치하였다. 석가여래는 앉아 있고, 두 보살은 석가여래를 향해 서 있다.

  본존의 정수리에서 피어나는 서기(瑞氣)가 상부의 좌우로 뻗어 나가고 있다.

  화면은 다소 어두운 편이고, 적색과 녹색, 청색이 주종을 이루며 본존 신광의 보상 단초문이 매우 화려하다.

  본존과 좌우 보살의 육신부 및 하단 바탕색이 세월이 오래되어 채색이 어둡게 변색되어 있다.

  화기 하단에는 주색 바탕에 먹 선으로 구획한 화기란에 묵서로 ‘건륭 41년 병신 팔월 일 신화성 상단탱 일회(乾隆四十一年丙申八月日新畵成上壇幀一回)’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영천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1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색조와 불보살의 원만한 상호, 유려한 신체 표현 및 본존 광배의 당초무늬의 장식 효과 등에서 뛰어난 화사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안료와 채색이 다소 칙칙하게 변하였지만, 화기명과 도상을 정확히 알 수 있어 조선 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천 영지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일괄(永川靈芝寺冥府殿石造地藏十王像一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영지사 명부전관련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이 협시하고 시왕상, 귀왕상, 판관상, 사자상, 금강역사상, 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모두 31구의 불상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들 존상은 희고 무른 석재인 불석으로 제작되었으며 각 도상의 상들은 격이 각기 다르지만 신체 비례나 얼굴, 옷 주름 표현 등이 대동소이하여 같은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되었다.

  영천 영지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일괄은 영지사 불단 가운데 민머리의 지장보살상은 머리를 숙여 오른쪽 발만 드러나는 반가부좌의 자세로 앉았다.

  몸과 한 돌로 조각된 손의 모양은 왼쪽 손바닥에 보주를 든 채 검지는 살짝 펴고 중지와 약지를 가볍게 구부렸으며,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해 같은 모양을 취하였다. 큰 머리에 허리가 짧은 상반신과 높은 무릎의 신체 비례는 전체적으로 상이 둔중하고 석재에서 오는 무게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머리는 녹색과 흑색으로 채색하였고 길고 큰 얼굴은 이마가 넓고, 양 눈초리 끝이 올라간 작고 가는 눈, 이마로부터 편평하게 이어지는 직선적인 날렵한 코, 높은 인중과 아래가 도톰하게 강조된 큰 입을 특징으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인상을 보여 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에 내의를 걸치고 그 위에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어 변형 편단우견(偏袒右肩) 방식으로 대의를 입었으며, 가슴 아래 꽃잎 모양으로 접힌 승각기(僧脚崎)와 그 아래 양측으로 접혀 있는 작은 옷 주름은 옷을 봉긋하게 보이게 해 실제 입은 모습처럼 표현하였다. 오른쪽 어깨에 사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대의 옷 주름과 배 앞에서 내의가 서로 교차된다.

  오른쪽 내의 자락의 옷 주름은 얇고 큼직하며, 끝이 뾰족하게 접혀 있는 모양은 특징적이다.

  양다리 사이로 내려오는 가운데 띠 모양의 옷 주름은 가장자리가 S자형을 그리면서 끝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옷 주름은 전체적으로 두껍고 날카로우면서 힘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왼쪽 무릎을 감싼 두꺼운 옷자락에 반원형의 옷 주름을 표현된 것도 특징적이다.

  왼쪽 다리와 무릎 위 옷자락은 다른 자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올려놓은 듯한 표현 기법은 1655년 보은 법주사 관음전 목조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혜희(惠熙)와 그와 관련된 조각승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와 같이 검지를 살짝 펴고 중지와 약지를 구부려 다리 위에 놓은 손 갖춤은 1688년 마일(摩日)의 김해 은하사 명부전 석조 지장상과 닮았으며, 두껍고 직선적인 옷 주름과 왼쪽 다리 위에 옷자락을 올려놓은 듯한 특징은 1655년 조능(祖能)의 김제 청룡사 목조 관음보살상, 1657년 인영(印迎·印英)의 진주 청곡사 업경전 목조 지장보살상, 1706년 안성 칠장사 지장전 목조 지장보살상 등 혜희의 계보를 잇거나 그와 관련된 조각승들의 불상 특징과 닮은 점이 많다.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도상적 특징이 다르지만 신체가 짧고, 장방형의 큰 얼굴과 이목구비 등의 표현은 두 상이 서로 유사하다.

  민머리의 도명존자상은 엷은 백록색에 원권 화문이 장식된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색 대의를 둘렀으며, 양손은 합장하여 본존 왼쪽에 서 있다.

  무독귀왕상은 머리에 원류관을 쓰고 가슴 앞으로 모아 쥔 공수(拱手)의 자세이며, 붉은색 포와 엷은 백록색 군의를 입었다.

  무독귀왕과 도명존자의 모습은 양옆의 시왕상들과 흡사하다. 시왕상들은 용머리 장식의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쥐고 있거나 한 손으로 수염을 만지고 있다. 혹은 양손에 책을 펼쳐 쥐거나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지물이나 자세가 크게 다양하지는 못하다.

  수염 모양을 달리하면서 흑백의 색으로 나이 차를 구분하였으며, 다리 아래 서수(瑞獸)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시왕을 보좌하기 위한 크기 50㎝ 내외의 동자상은 두 갈래로 묶어 틀어 올린 머리를 하거나 머리를 풀어 아래로 내린 모습이다.

  손에는 연잎과 연꽃, 호랑이 등의 서수, 장수와 수명을 상징하는 복숭아 등의 과일이나 벼루 등을 쥐고 있다.

  턱이 발달한 각진 방형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코, 입술의 미소가 어우러져 귀여우면서도 독특한 인상은 다른 존상과 다르지 않다.

  옷은 포를 입고 그 위에 운견(雲肩)이나 천의를 두르기도 하며, 군의 길이를 길게 혹은 다리가 드러나게 입었다.

  시왕 옆으로 귀왕·판관·사자상이 각각 있는데, 면류관을 쓴 귀왕과 관모를 쓴 판관은 무독귀왕과 같은 공수 자세에 장삼과 군의를 입은 모양이 거의 흡사하다.

  사자상은 손에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 있으며, 머리에 유건형의 모자를 쓰고 하반신에 고의를 입었지만, 좌측의 사자상은 군의를 길게 내려 입어 판관이나 귀왕의 착의법과 같다.

  명부전의 가장 바깥에 위치하는 금강역사상은 틀어 올려 묶은 머리에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한 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주먹을 불끈 쥐고 있으며, 부릅뜬 큰 눈, 큼직한 코와 꽉 다문 입, 목·가슴·팔과 다리 위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두드러져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영지사 명부전의 본존인 지장상은 목이 짧고 다리가 높은 신체, 사선으로 올라간 작은 눈, 직선적 느낌의 코, 검지·중지·약지를 살짝 구부린 변형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날카로우며 힘이 느껴지는 옷 주름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하며, 이는 다른 존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같은 표현 기법은 1655년 법주사 관음전 목조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혜희, 조능, 마일, 금문(金文) 등 혜희의 계보를 잇는 조각승의 불상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어 영지사 명부전 존상은 혜희파 조각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파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활동하였으며, 영지사 본존인 지장상의 손 모습은 1688년 김해 은하사 명부전 석조 불상과 아주 유사하여 이 상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혜희파 조각승의 불상은 화려하고 힘이 있으며, 강렬한 인상을 특징으로 한다. 주로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천, 김해, 양산 등에서 이 유파와 관련된 불상들이 발견되어 이들의 활동 범위가 훨씬 더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천 영지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일괄은 조선 후기 조각승의 계보와 유파, 그들의 활동 지역 및 시기 등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道鬼들(김성길회원.김성호회원.정승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