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선생묘(丁若鏞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번지)
조선 정조대의 문신이자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묘이다.
수원 화성의 성곽제도를 만들고, 공정을 단축시키는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을 축조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선생은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목민심서』 · 『경세유표』 ·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겨 민생을 위한 개혁에 크게 공헌하였다. 묘역은 부인 풍산홍씨(豐山洪氏)와 합장된 하나의 봉분 형태이다.
묘제(墓制 :묘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는 대부분 새 석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정비한 것이다.
봉분 정면 오른쪽에는 묘표를 1기 세웠는데, 1959년에 새로 제작하였다. 봉분 앞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과 배설석을 놓았는데 근래에 조성한 것이다. 묘역 동쪽에는 1974년에 새로 세운 묘표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정약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188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채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烈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 임오년(1762)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烈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정조7,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의 공로로 시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재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부사(谷山副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어 원옥(寃獄)을 다스렀다. 경신년(정조24, 1800)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조대왕(正朝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 선생(李瀷先生)의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이승훈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렸는데, 신해년(정조15,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 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등이 서교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만 뒤에 두 형 약전(若銓) 과 약종(若鐘)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 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되었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信)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 18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寃)으로 방축 향리(放逐 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만인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가을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지 18년 동안 경전에 전심하여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및 목민(牧民). 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纂)한 것이 거의 2백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 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漿) 이 동열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포에 상사(償賜)로 받은 서적.내구마(內廐馬)문피(文被)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차(珍饌) 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 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녀(순조22,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 백천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한 뒤로 한양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敎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재학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용두, 대사헌 윤복, 관찰사 호선, 교리 언벽, 병참의 시윤이 모두 옥당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縣)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 증조의 휘는 향신, 조부의 휘는 지해인데 오직 중조께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는 6남3녀를 날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遊) 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 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금밀(近密)에 들어갔네
임금의 복심(腹心)이 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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