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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東海 三和寺 三層石塔)

노촌魯村 2023. 9. 23. 06:47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東海 三和寺 三層石塔. 보물.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84 (삼화동, 삼화사))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 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 탑 25기와 청동제 불 대좌 조각 2점, 철 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출처 : 문화재청)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고대로부터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만큼 탑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불탑이 건립된 것은 곧 그 시대에 불법이 흥성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이르는 삼국시대 말기로 알려졌다. 신라 선덕여왕 때(632~646)인 7세기 전반부터 후반으로 가면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으며 이때 많은 탑이 건립되었으며 오래된 고찰에는 반드시 불탑이 부처님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천년고찰 삼화사에도 석탑이 없을 수 없다.

법당(적광전) 앞마당 중앙에 고색이 창연한 옛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범상치 않다. 규모는 3층으로 높이는 4.7m이다. 이 탑은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소멸과 중건을 반복해 온 것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탑의 구조와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은 남북으로 장대석을 놓고 동서로는 그사이에 끼게 된 4매 석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석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 기단의 면석은 각 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 층 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를 살펴보면 긴 찰주가 남아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과 복발, 보륜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개의 철환도 남아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분리형 철주가 꽂혀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 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별석의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 석탑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 말로 추정된다. 1967년 이 탑을 실측 조사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6월 이 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되었다.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신라 시대에 조성된 불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 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 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전부가로부터 천년 석탑의 자리 선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고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 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인 1997년 4월 초였다.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 2개, 철편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옮겨 세워질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 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 내에 봉인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1277호 (1998.6.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 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 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 조정된 것은 이 절의 철불 제작 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처 : 삼화사)

적광전에서 본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납석제소형탑(출처 : 문화재청)
목함(木函) (출처 : 문화재청)
목함내발견유물(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