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2건의 대형누각(樓閣)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하고, 2013년 12월 28일(목)에는 삼척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삼척 죽서루」의 국보 지정서 전달 행사를 개최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에 대한 지방자치단체들의 국보 지정 요청에 따라, 관계 전문가의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심의를 거쳐 이번에 국보로 지정했다.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하였던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되었으며, 안축(安軸, 1282~1348)과 정추(鄭樞, 1333~1382) 등의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竹西樓丹靑記)』(1472), 허목(許穆, 1595∼1682)의 『죽서루기(竹西樓記)』(1662) 등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된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조선 후기 증축된 이후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 허목은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竹欌寺)라는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다’라는 뜻으로 붙었다고 소개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팔작지붕 : 맞배지붕 옆에 삼각형의 합각을 남기고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
또한,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관동별곡(關東別曲)』,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비롯해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와 그림 등을 남겼다. 더불어 주변 하천인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이번에 삼척 죽서루와 같이 국보로 지정된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 ?∼1135)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야경을 표현한 한시 『영남사루(嶺南寺樓)』를 남김
조선 초에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경상도사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 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었으나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하면서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면서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만이 남아 있다.
이들 대형누각은 강원과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건축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경관적인 아름다움도 크며,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방문하여 시문(詩文)을 남기는 등 학술적 가치도 높다.
한편 28일 「삼척 죽서루」 경내에서 개최되는 국보 지정서 전달 행사는 최응천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박상수 삼척시장 등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와 축하 공연, 국보 지정서와 감사패 전달, 한시 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하는 「삼척 죽서루」, 「밀양 영남루」 의 문화유산이 체계적으로 보존·관리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방자치단체 등과 지속적인 협조와 적극행정을 이어갈 계획이다.
□ 종 별 : 국보
□ 문화재명 :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9-3번지 등
ㅇ 구조/규격 : 목조누각 팔작지붕(정면 7칸, 북측면 2칸/남측면 3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국가(삼척시)
ㅇ 지정면적 : 247.1㎡
□ 지정사유
ㅇ 삼척 죽서루는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라 불리기 시작했다.
ㅇ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 되었으나 관련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조선후기 증축된 이후 그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ㅇ 삼척 죽서루는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되었고,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되었다.
ㅇ 삼척 죽서루에는 조선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과 명신들의 한시가 현재 28점이 남아 있다. 삼척 죽서루를 표현한 그림도 남아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죽서루의 그림이다.
ㅇ 삼척 죽서루는 각종 기록을 통해 중창과 후첨된 건립연대가 명확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고, 조선 초기와 중기 이후의 건축 원형을 잘 유지하면서 시기별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며,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과 그림이 많이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크다. 더불어 주변 하천인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진 죽서루의 빼어난 경관 등을 고려할 때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종 별 : 국보
□ 문화재명 :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경남 밀양시 내일동 40번지
ㅇ 구조/규격 : 대루(누각 팔작지붕 /정면 5칸, 측면 4칸), 능파각(단층 팔작지붕 /정면 3칸, 측면 2칸), 침류각(단층 팔작지붕 /정면 3칸, 측면 2칸), 여수각(계단형 팔작지붕)
ㅇ 수 량 : 1동(대루, 능파각, 침류각, 여수각)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국가(밀양시)
ㅇ 지정면적 : 693.6㎡ (보호구역 : 12필지 12,931.7㎡)
□ 지정사유
ㅇ 영남루의 시초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공민왕 때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누각을 중창하면서 영남루(嶺南樓)라 했다.
ㅇ 조선 초에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 현 침류각)를 건축하였고, 연산군 때에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 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되었다.
ㅇ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고, 이후 중창 및 중수를 거듭하였다. 영남루는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동서에 각각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ㅇ 밀양 영남루는 빼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명사들이 남긴 시문을 적은 시판이 조선 선조 때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가 남아 있다.
ㅇ 밀양 영남루는 풍부하게 남아있는 각종 고증기록을 통해 16세기부터 현 위치를 유지하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빼어난 건축형식과 배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으며, 수많은 명사들이 탐방하고 교류하며 남긴 시문 등은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