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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상화 고택(李相和古宅) ·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노촌魯村 2024. 4. 18. 16:06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계산동2가 83-1])

이상화 고택(李相和古宅)은 항일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상화((李相和)[1901~1943]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191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화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3-1번지에 있다. 계산성당 남쪽에 해당하며 주변에는 서상돈 고택이 있다.

이상화 고택은 대구도심개발사업으로 이상화 고택이 헐리게 되자 1999년 전개된 대구고택보존시민운동으로 건물의 보존이 이루어졌다.

2002년 2월 경북대학교 교수 이상규를 중심으로 ‘민족시인 상화 고택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100만인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이상화 고택을 매입하여 2005년 10월 27일 대구광역시에 기부채납하였다.

대구광역시는 대지면적 205㎡, 건축면적 64.5㎡의 ‘ㅡ’자형 목조 주택 2동을 1940년대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보수하였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하였다. 2008년 8월 12일 개관하였다.

이상화 고택은 단층 목조주택 2동이다. 안채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이다. 3칸은 방이며 1칸은 출입문이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주로 이상화 시인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계산동2가 83-1])

서상돈 고택(徐相燉古宅)관련항목 보기은 개항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서상돈[1851~1913]의 주택이다

서상돈 고택관련항목 보기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2008년 이상화 고택 바로 옆으로 이전·복원되었고, 서상돈 고택터에는 현재 주상복합건물이 세워져 있다.

서상돈 고택은 2003년 조사 때 건축면적 89.6㎡였다.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남향으로 좌정하고 있는 안채 좌우에 아래채와 곡간채, 앞쪽에 대문채와 연결된 사랑채를 배치한 튼‘ㅁ’자형 구조였다. 아래채는 후대에 건축하였기 때문에 원래는 튼‘ㄷ’자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과 안채, 사랑채 사이에는 붉은 벽돌로 쌓은 아치형의 중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적법, 구성 기법 등을 보아 중국인들이 세운 종교 계통의 건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었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을 배치하고, 우측에는 건너방을 배치하였다.

안방과 건너방 앞에는 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의 각 칸에는 미세기 문을 달았고, 하부 고막이는 타일로 마감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의 구성은 안채와 같다. 아래채는 시멘트블록조 1층의 슬래브 지붕집이다.

곡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집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다.

대문간채는 사주문으로 가 부재의 치목·장식 수법이 간결하여 근대 시기 주거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2020년 현재 서상돈 고택은 대문 안쪽에 벽돌로 담장을 쌓고 안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안채 건물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ㅡ자형이다.

부엌, 대청마루, 안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청마루 앞쪽에 유리문을 달아 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이다. 마루에 유리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는 전통 한옥이 아닌 도시형 개량 한옥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