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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구 중구 계산동 '뽕나무 골목'

노촌魯村 2024. 4. 22. 13:55

계산동 뽕나무

뽕나뭇과의 낙엽활엽교목인 뽕나무는 북반구의 온대, 난대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에 분포한다.

뽕나무의 열매는 식용·약용하고 나무껍질은 노란색 염료로, 목재는 가구재로 쓰는 등, 예전부터 활용 가치가 커서 소중히 여겨진 나무이다.

무엇보다도 잎이 비단실을 뽑는 누에의 사료로 쓰여, 나라에서 뽕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였을 정도였다.

계산동 뽕나무는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1에 있는 대구 계산동성당 뒤뜰에 있는 여덟 그루의 뽕나무를 비롯하여 계산동 일대에 자생하고 있는 뽕나무들을 일컫는다.

계산동 뽕나무는 조선 후기에 계산동 지역에 정착한 중국인 두사충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뽕나무는 나무높이 12m 정도까지 자란다. 가지는 회백색 또는 회갈색이다. 잎은 3~5갈래로 갈라진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끝은 뾰족하다.

잎자루와 뒷면 맥 위에 잔털이 자란다. 꽃은 6월에 피는데, 수꽃이삭은 새 가지 밑 부분 잎겨드랑이에서 처지는 미상꽃차례에 달리고 암꽃이삭은 5~10㎜이다.

열매는 ‘오디’라고 불리며 1.5~2.5㎜ 크기이며 포도 비슷한 모양이다. 연녹색에서 점점 붉게 자라 검붉은 색으로 변한다.

뽕나무는 암수딴그루이며 봄에 꽃이삭이 달리고, 열매인 오디는 6~7월에 검게 익는다. 잎은 누에의 사료로 쓰고 나무껍질은 노란색 염료, 목재는 가구재로 쓴다.

두사충(杜思忠)은 원래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인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원군으로 왔다가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에 귀화하여 계산동에 자리를 잡았다.

두사충이 계산동 주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이후 그 일대를 ‘뽕나무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뽕나무골목에는 두사충을 그린 벽화나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뽕나무와 연관된 두사충의 사랑 이야기가 소재로 쓰이고 있다.

두사충의 사랑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였고,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뜬다시피 하여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두사충을 지켜보던 두사충의 아들은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아낙네를 만나 보았다. 이웃집의 아낙네 또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두사충이 말년에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기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가고 일대에 민가가 들어섬에 따라 뽕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뽕나무 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두사충의 전설이 아직 전하여 오고 있다. 현재 대구 계산동성당에 서 있는 뽕나무가 두사충이 심은 나무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모명재

대구 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사람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 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하네(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今日一盃情)'

 

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감영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¹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고산서당)이 들어섰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청 자료에서)

※ 주(註)계좌정향(癸座丁向) :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향해 좌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