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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노촌魯村 2026. 6. 19. 06:11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구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경문왕 3년(863)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였다.(글:국가유산청)

1. 유물 개요지정 구분: 대한민국 보물 

  소장처: 동국대학교박물관

  시대: 통일신라시대 (863년, 경문왕 3년)

  재질: 납석(蠟石, 무른 돌의 일종)

2. 발견 경위와 특징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의 1층 몸돌 안에서 발견되었다.

  1966년 석탑의 도굴 사건 이후 사리장엄구들이 수습되었는데, 이 사리호는 도굴 당시 파손되어 현재 4조각으로 깨져 있고 뚜껑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작고 아담한 항아리 형태이며,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것이 특징이다.

3. 역사적 가치와 의미이 유물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몸통에 새겨진 '명문(銘文)' 때문이다.

  내용: 몸통에 가로·세로 칸을 나누어 7자 38행의 글자를 새겨, 863년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민애왕은 왕위 찬탈 과정에서 희강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고, 경문왕은 그 희강왕의 손자이다. 즉,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문왕이 민애왕의 원찰(願刹) 성격인 이 탑을 조성하고 사리구를 봉안했다는 점은 당시 왕실의 내분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통합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명문 원문 (한문)]

(※ 유물 파손 및 마모로 인해 판독된 글자를 바탕으로 한 주요 원문이다.)

咸通四年癸未三月十五日 愍哀大王之眞骨舍利… 孝昭大王之子 憲康大王之孫 景文大王… 追慕先代… 願此寶塔 永充法界… 維那純梵 心德 永忠 大師昌具… 匠人梵覺…

이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咸通四年癸未(함통 4년 계미): 당나라 의종의 연호인 함통 4년(서기 863년)을 의미한다.

愍哀大王(민애대왕): 경문왕이 명복을 빌고자 했던 민애왕이다.

景文大王(경문대왕): 탑을 조성한 경문왕 본인이다.

維那(유나):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여기서는 순범, 심덕, 영충이 그 역할을 맡았다.

匠人(장인): 이 사리호를 직접 만든 사람으로 '범각'이라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1. 비로암의 건립 시기

  비로암은 통일신라 시대인 863년(경문왕 3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신라 하대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왕실의 안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전국 곳곳에 불교적 기원을 담은 원찰(願刹)이 많이 세워지던 때입니다. 비로암 역시 제44대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2. 건립의 근거: 삼층석탑과 사리호

  비로암의 정확한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비로암 대적광전 앞에 위치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이다.

  사리호의 기록: 1966년 이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리함(사리구)이 발견되었다. 비록 일부가 도난당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으나, 남겨진 납석제 사리호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863년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탑을 세웠음이 명확히 밝혀졌다.

3. 비로암의 역사적 특징

  왕실의 원찰: 비로암은 단순한 암자를 넘어, 신라 왕실이 직접 나서서 죽은 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세운 특별한 공간이다.

  신라 하대 불교 예술의 정수: 이곳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은 8세기 전성기에 비해 정형화되고 다소 엄격해진 9세기 신라 불교 조각과 건축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보물 제247호. 대구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동화사 (도학동))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 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국가유산청)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 대구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동화사 (도학동))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출처 :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