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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국외)/중국

개봉의 포공사

노촌魯村 2006. 8. 24. 12:14

포공사 정문

 

 

 

 

 

 

 

 

 

  포증이 처음 유명해지게 된것도 바로 이 "효"와 관계가 있다고 보아진다. 포증은 999년에 태여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에 효성하기로 소문난 포증은 28살에 진사급제하였다. 하지만 포증은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후 그는 양친이 다 돌아가신후 40여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역사에 길이 남기게 되였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포증을 중국역사에서 지극히 탁월한 견식과 포부를 지닌 정치가, 개혁가, 법률전문가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포증이라하면 "천하제일 청백리"로 더욱 알려지고 있다.

  기원 1056년, 포증이 57살 되던해에 그는 경성개봉부를 맡아 관리하게 되였다. 1년 넘게 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법집행을 엄격히 하였고 과감히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였으며 경성의 권문세족들의 오만무례한 기세를 꺾어 놓았습니다. 일부 고관대작들은 포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감에 떨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개봉부의 어린이, 여성할 것 없이 포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였고 이때로부터 포증은 또 사람들로부터 "포특제"(包特制)라고 친절히 불리우게 되였다.

  기원 1062년 추밀부사(樞密副使)[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함]로 승진한 포공은 병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개봉부의 정직한 관리들은 그누구도 비통해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없었다고 한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당시 경성 곳곳에서는 가는 곳 마다 포증의 임종 시 유언에 대해 의논이 많았다고 한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돌아간 후에도 사람들은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http://kr.chinabroadcast.cn/1/2006/05/01/1@60142.htm)에서 일부 복사

 

 

 

부마를 벌하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공주가 자기 남편인 부마를 벌하려하자 악을 쓰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포증이 쓴 사모(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대 갖추어 쓴 모자)를 보면 뒤 중심에서 양옆으로 날개 모양이 달려 있는데 그 길이가 대단히 길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포증이 키가 작아 다른 관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가 다른 관리가 포증의 근처에 접근을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모의 날개를 길게하였다는 설이 있다.                                                                 

 

 

 

 

 

 

 

 

 

 

 

 

 

 

 

 

 

 

 

 

'허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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