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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백률사 및 소금강산 마애삼존불

노촌魯村 2007. 2. 28. 14:28

소금강산 가슭에 위치한 사찰로써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이 절의 대비관음상은 중국의 장인이 중생사의 관음소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는 속전이 있고, 또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2)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며 이 대비관음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이(神異)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692년에 국선이 된 부례랑(夫禮郞)은 693년 3월에 화랑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릉지방에 이르렀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문객들은 당황하여 돌아갔으나 안상(安常)만이 그를 뒤쫓아 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으므로 창고를 조사시켰더니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두 보물이 없어졌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는 이 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향나무로 만든 탁자위에 현금과 신적이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놀라 그 내력을 물으니 부례랑이 적에게 잡혀가서 말먹이는 자가 되어 방목을 하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승려가 손에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나를 따라 오라"고 하였다. 해변에 이르러 거기서 안상과 만나게 되었다. 승려는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으로 하여금 하나씩 타게 하고 자기는 현금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잠깐사이에 백율사에 왔다는 것이다. 부례랑이 현금과 신적을 왕에게 바치고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백율사에 금과 은으로 만들 그릇과 마납가사를 받쳐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불국사 아미타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상 등과 함께 신라 삼대 금동불의 하나이기도 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제작된 시기는 8세기말에서 9세기초로 추정이 된다. 높이는 177cm로 원래는 백율사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927년 이차돈순교 석당비와 함께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영험과 함께 백율사는 상당히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임진왜란때 폐허화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주의 부윤 유승순이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적(異蹟)을 남긴 관음상은 그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선원, 요사체가 있다.

이들 가운데 대웅전은 조선 선조때에 중창한 것으로 경내에 있는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애탑은 높이가 3.12m나 되는 삼층탑으로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상륜부가 온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백율사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자연암벽을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옥개석, 우물개석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비탈의 암반 위에 지름 31cm, 깊이 24cm의 원형공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조선시대 부도가 놓여 있던 자리이다. 석종형(石鐘形) 부도였던 것 같은데 일제시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채 있었다 하나 그 이후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신라문화진흥원)

 

마애탑

  

 

 백율사 마당에 가에 석등대석 우물의 우리 등 석재가 남아 있다.

 

 

 범종에 새겨진 이차돈 순교의 내용

삼국유사에 의하면 법흥왕 14년 이차돈이 불법을 포교하다가 순교하였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젖같은 피가 한길이나 솟았고 그의 목도 소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고 한다

 

  백율사가 있는 소금강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30m쯤 내려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마애삼존불이 있다. 오랜 세월의 풍화로 거의 마멸되어 손모습이나 얼굴모습은 식별하기 어렵다. 삼존불의 바위상부에는 목재 구조물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마애불과 함께 주목되어지는 곳은 마애불 100m 아래에 사지로 추정되는 넓은 대지가 있는데 이 일대가 자추사지(刺楸寺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법흥왕 14년 이차돈이 불법을 포교하다가 순교하였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젖같은 피가 한길이나 솟았고 그의 목도 소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나라 사람들은 이를 슬피여겨 금강산의 좋은 터에 이차돈을 위하여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혹자는 백율사를 자추사가 변한것이라고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시대까지 이차돈의 묘와 비가 유존하고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길은 없다.

 

 

 

 

 

 목재 구조물 흔적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백률사 유물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와 뒤로 젖혀진 상체와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문화재청)

 

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

 

이차돈 순교비(백율사에 넘어진 모습) 

금강산(金剛山)

경주시내 북쪽에 있으며 해발 280m, 남북 길이 2.75km, 동서 0.7km의 세장(細長)한 형태의 산이다. 골짜기가 깊거나 그리 높지도 않은 산이지만 설씨시조(薛氏始祖)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虎珍)의 악강지(嶽降地)였으며, 이씨시조(李氏始祖) 양산촌장(陽山村長) 알평(謁平)과 표암(瓢巖)이 얽힌 전설이 있어서 신라초기부터 성산(聖山)으로 숭앙(崇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은 흔히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부르고 있으나 신라시대에는 금강산(金剛山), 금강령(金剛嶺)이라 하였는데 이는 불교에서 유래된 명칭이고, 왕경(王京)의 북쪽에 위치하는 관계로 북악(北嶽), 북산(北山), 북령(北嶺)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차돈이 순교할 때 머리가 이 산에 떨어졌다고 하며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자추사(刺楸寺 지금의 백율사)를 지었다고 하는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하나인 영산(靈山)이었다.

이 산에는 백율사 뿐만 아니라 굴불사지(掘佛寺址), 동암지마애삼존불(東庵址磨崖三尊佛), 큰 절터, 전(傳) 도장사지마애불(道場寺址磨崖佛) 등 불교유적과 석탈해왕릉을 비롯한 많은 통일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다.          

백율사 옛사진
백율사 옛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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