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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불국사

노촌魯村 2007. 3. 22. 16:09

 불국사 일주문

 불국사 천왕문

 불국사 사천왕상

 

불국사

사적 및 명승 제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서남록에 자리 잡은 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 김대성에 의해 기공되고 혜공왕 10년(774)에 이르러 80여 동의 목조 건물이 들어선 대가람으로 완성되어 신라 호국 불교의 도량으로서 법등을 이어왔다. 조선 선조 26년(1593) 왜병의 침입 방화로 650여 년 간 내려오던 불국사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의 건물이 다시 세워져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불국사가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승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호국 정신을 기르는 도량으로서의 옛 모습을 되찾게 하고 자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창건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움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교.칠보교가 국보로 보존되어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이용한 예술품의 훌륭한 솜씨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극략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을 비롯한 수다한 문화유산들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문화재관리국)

 

 

 

 청운교 백운교

 청운교 백운교 아래 홍예

범영루                            자하문                                      경루

 자하문을 중심하여 좌측 범여루 우측 경루(수학적인 비대칭)

신라 사람들이 왜 수학적 비대칭으로 ...?

여기에는 신라인들의 심오한 의미기 있습니다.

아래에 그 해법이 있습니다.

 자하문 현판

여기에도 수학적인 비대칭! 

해와 달을 상징하는 보(해는 뜨고:좌측. 동쪽 , 달은 진다:우측. 서쪽)

 범영루

 

 범영루는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입니다

 범영루의 주춧돌(안상문)

 

 범영루 안의 법고

 석축대(자연석과 인공석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렝이 기법

둘글넓적한 자연석과 인공으로 다듬은 장대석(기둥) 사이에  한치의 틈도 없이 딱 아귀가 맞는데, 이렇게 돌의 울퉁불퉁한 모양에 맞게 장대석(기둥)을  깍아 얹는 방식을 '그렝이 기법'이라 합니다.

 석축대의 수구

 경루

경루는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이지만 범영루에 비하여 단순하고 검소한 건물입니다.

 

 석가탑                             대웅전(부처님)                             다보탑

 대웅전을 중심하여 석가탑과 다보탑(수학적인 비대칭)

대웅전을 중심으로 보면 좌측의 석가탑과 우측의 다보탑은 수학적인 비대칭이 됩니다.  그러나 자하문을 중심한 범영루와 경루의 수학적인 비대칭을 조합하면 즉 석가탑과 범영루, 다보탑과 경루를 조합하면  대웅전의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아주 멋진 무게 중심을 이루어 고차원의 대칭이 됩니다.)

 위의 사진과 아래 사진을 비교하면서 감상하십시오

 범영루                              자하문                                 경루

 

석가탑(釋迦塔. 佛國寺三層石塔)

    <높이 8.2m.통일신라(8세기 중엽).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경내.국보 21호>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라는 데서 일명 석가탑이라고도 하는데 탑을 세우는 과정에서의 전설적인 사연으로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이름도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조탑(造塔) 활동은 그 성대인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여 전형 양식의 정형기를 맞이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석탑이 바로 석가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건조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형성한 것으로서, 옥개석의 선이 단조롭고 소박하면서도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상륜부는 3층 옥개석까지 찰주공이 뚫려 찰주가 박혔으며 노반. 복발. 앙화와 보륜 1개가 남아있었는데, 1973년 공사 때 상륜부 전부를 복원하였다.
  석가탑 기단 외곽에는 길고 둥근 돌을 돌려서 탑구(塔區)를 이루었다. 네 모퉁이와 중앙에는 81cm의 연화결좌(蓮花結座)를 만들어 놓았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언급되어 있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바로 이것이다. 학자들은 이 팔방금강좌가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을 안치한 자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팔부보살(八部菩薩)을 안치했던 곳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또 단순히 이 자리는 신성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1966년 10월 석가탑 복원 개수공사 조중 3층 탑신 중앙부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나왔다. 이들 문화재는 일괄해서 국보 제 126호로 지정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된 목판 인쇄물로서 우리에게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준다.
   통일초기에 있어서 목탑의 모방을 벗어나지 못했던 초기 석탑과는 달리 이 석탑에서는 완전한 신라식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되었다.

 석가탑 아래 암괴

 석가탑의 팔방금강좌(연화문)

다보탑(多寶塔) 

<높이 10.4m.통일신라(8세기 중엽).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국보 20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 서쪽의 석가탑과 상대하여 동쪽에 위치하였는 바 이 동서 쌍탑은 감은사에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呂來常住證明)의 뜻으로 건립된 이 다보탑은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로 건조된 이형석탑(異形石塔)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다보탑은 상륜부의 보주를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다만 기단 네 모통이에 4구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1구만이 앉혀져 이다.
  다보탑은 직선과 곡선, 그리고 강약이 환상적으로 조화된 세계 미술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기상천외의 탑이다. 이렇게 정밀하고 우아한 탑은 많은 불교 국가 가운데에서도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는 걸작 중에도 걸작이다.
  탑신의 첫 층은 방형의 기단의 난간을 돌리고 그 안에 8각의 옥신을 세운  후 8각의 지붕돌을 덮었다. 그 위에 다시 8각의 난간을 돌리고 대나무 모양의 기둥 8개에 싸인 옥신이 있고 앙련이 조각된 지붕돌을 덮었다. 그 위의 옥신 주위에는 8개의 꽃술 모양의 기둥이 8각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의 조각은 연꽃 외에 대나무의 기둥, 난초꽃, 국화 모양의 받침돌, 매화 모양의 장식 등이 있는데 이것을 도교에서 말하는 매란국죽(梅蘭菊竹)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상륜부는 거의 원형에 가까운 8각형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조화와 변화 속에 층층이 올라가고 있다. 다보탑은 이렇듯 발 밑에서 머리 끝까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261개의 단단한 돌을 목각(木刻)보다도 정밀하게, 찰흙보다 부드럽게 빚어낸 다보탑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신라의 충격이라고 하겠다.
  1925년 일제 침략기에 수리되었던 바 당시 탑내에서 발견된 귀중한 사리장치 일체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다보탑의 사자상

 대웅전의 불상

무설전(無說殿)

  무설전은 경론을 강의하는 강당으로 대웅전 뒤에 있다. 670년 문무왕이 창건하였는데, 의상대사와 그 제자되는  오진(悟眞). 표훈(表訓) 등이 불경을 강의하였다. 무설전은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는데 조선 숙종 34년(1708)에 복원하여 일제 침략기에 허물어져 1970년대에 재건하였다.
  "무설(無說)로 오각(悟覺)한다는, 곧 오각은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있다."는 의미심장한 건물의 이름이라 하겠다. 더불어 「지극한 진리에 이르려면 모든 진리를 뛰어 넘어야 한다(無理之至理)」는 불교의 가르침을 현판에서 느끼게 한다. 

 

 관음전 가는 낙가교(계단)

 관음전

 

 관음전 내부(관세음보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무용 

 

 

 

 

비로전(毘盧殿)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

  비로전은 무설전 뒤쪽 높은 곳에 있으며 관음전 왼쪽 아래에 있다. 건물은 1973년 복원 공사 때 고려 시대의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비로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비로자나불이 있다. 비로자나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의미로, 여러 부처 가운데 가장 높은 화엄불국의 주인이 되는 부처님이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1.8m,.머리 높이는 55cm, 폭은 1.36m이다. 몸은 바로 앉아서 정면을 향한 모습이고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잡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불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한 것이다. 지권인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중후한 얼굴 모습은 아미타여래에 비해서 조금 살찐 듯하며, 목에는 힘줄을 나타내어 더한층 위엄을 돋보이고 있다. 오른쪽 어깨는 역시 가사를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조형미의 극치를 나타내어 신라인들의 탁월한 기품을 실감하게 한다.(문화재청)

 비로전의 비로자나불

 불국사 광학부도

 

 

 

 

 응진전

 

 극락전에서 대웅전 가는 48계단

 

극락전과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

  연화.칠보교의 두 다리를 올라서서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혹은 無量壽佛)이 계시는 서방(西方)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성역(聖域)이다.
  극락전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높이는 1.8m, 머리 높이 48cm이며, 양 무릎의 너비는 1.25m이다. 자비스럽고 원만한 얼굴에 두 눈은 반개(半開)하여 정면을 정시(正視)하였다. 아미타여래의 손은 구품수인(九品手印) 중 중품중생(中品中生)이고, 한쪽 어깨를 벗은 채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그 위에 큰 육계(肉?)가 있고 건장한 육체미가 박력에 넘치면서 자비와 위엄을 느끼게 해 준다.
  극락전에서 대웅전가는 길에는 3열로 지어 16계단이 있다. 모두 합치면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여래의 48원(願)을 상징한다. 아미타여래는 과거세에는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의 비구로 수행을 하였는데 48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 48원이 계단의 층마다 어려서 극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문화재청)

 

 

 극락전의 아미타불

 극락전의 석등

 

 극락전 가는 연화교 칠보교

 

 연화교의 연화문(계단 바닥에 연화문이 조각)

연화문 석조

 연화문 석조의 안상문

 연화문 석조의 연화문

 당간지주 옆의 석조(뚜껑이 있음)

 

 

 당간지주

 

 부춧돌과 매화틀(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부춧돌(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매화틀(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극락전 서편 석축

 극락전 서편 석축의 돌못

 1970년대의 불국사 복원비

 

불국사 옛 사진 모음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

 

 대웅전

불국사 창건 설화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궁색하여 생활하기조차 어려워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어느날 점개(漸開)라고 하는 스님이 흥륜사(興輪寺)에서 육륜회(六輪會)를 열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했다.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 스님이 축문을 읽으며 축원하였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니 천신(天神)께서 항상 지켜주소서. 하나의 보시로 만 배를 얻고 안락하게 장수하소서”.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들어가 그 어머니께 말하였다.
“제가 문 밖에서 스님의 축원하시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컨대 우리가 전생에 선한 일을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이니 지금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하게 살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훗날의 과보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옳다고 하여 그 밭을 점개 스님에게 보시하였다. 얼마 뒤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안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그 때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만에 폈다. 손 안에 ‘대성’이라는 두 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어 또 대성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봉양하였다.
장성하자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 용서를 빌자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줄 수 있겠느냐?”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한 후 꿈에서 깨어났는데 땀이 흘러 자리를 적실 정도였다. 이로부터 대성은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로 인해 마음에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의 원력이 더욱 깊어갔다. 이에 현세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神琳)·표훈(表訓) 두 성사를 청하여 각각 거주케 하였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해 부모의 기르신 은혜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드문 일이었다. 어찌 착한 보시의 영험을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실의 뚜껑돌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면서 선잠을 잤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갔다. 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께 공양하였다. 이로써 그 곳 이름을 향령(香嶺)이라 하였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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