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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간묘(慶州 諫墓)

노촌魯村 2007. 3. 24. 22:20

경주 간묘(慶州 諫墓)(김후직의 묘):경주시 황성동 계림중학교 뒷편에 있다

 

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신라22대)의 증손으로 왕손이다. 신라 16관등 가운데 2등급인 이찬(伊餐)으로서 진평왕 2년(580)에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일반인의 촌수로 치면 후직은 진평왕의 아저씨 뻘이다.
그 즈음 왕이 사냥하기를 무척 좋아해 나라 일을 소홀히 하는 형편이었기에, 김후직이 간(諫)하기를 "옛날 임금들은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보살폈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며 처리하였고, 좌우에 올바른 판단으로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두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며, 부지런하고 꾸준하여 감히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라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고, 민심이 순후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거늘, 이제 임금께옵서는 날마다 난봉꾼들과 포수들을 데리고 사냥개와 매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으려고 산과 들로 뛰어 다니는 일을 스스로 제지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노자(老子)라는 책에 이르기를 '사냥에 정신이 팔리게 되면 자신의 마음도 걷잡지 못한다'하였으며, 상서(尙書)에는 '안으로 계집에게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이 중에서 한가지만 취하여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하였습니다.
이렇다고 하면, 임금에게 있어서 사냥이란 안으로는 마음을 흩트려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는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임금께서는 반성하시어 명념하소서."하였으나 진평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사냥 길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후직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또다시 간절하게 말리고 간하였지만 사냥은 계속되었다. 그 뒤 김후직이 병들어 죽을 임시에 자기 세 아들을 불러놓고 "내가 나라의 신하로서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아 드리지 못하였는데, 만약 대왕이 방탕한 오락으로 사냥하기를 끊지 못한다면, 이로써 나라가 패망할 지도 모른다.
이 어찌 크나큰 걱정거리가 아닌가! 내 죽어서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드릴 작정이니, 내 주검[屍身]을 임금이 사냥 다니시는 길 옆에 묻어다오."라고 하였으므로, 후직이 죽은 후에 그 아들들이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왕이 사냥가는 길 가에 무덤을 쓴 사연을 자초지종 다 듣고 난 진평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 분이 죽어서도 충성으로 과인을 타이르는 것이니, 짐을 사랑함이 부모와 같도다. 만약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승이거나 저승에서나 어찌 대할 낯이 있겠는가!"하고는 궁으로 되돌아가 몸과 마음을 근신하며, 이후로는 평생토록 사냥하지 않았다.(삼국사기 열전. 동경지)

밑 둘레 84m, 높이 5m 정도인데 경상북도 기념물 3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자그마한 상(床)돌이 놓인 묘 앞 오른쪽 서편에 높이 1.8m 되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바닥에는 받침돌인 농대석을 깔고, 그 위에 비 몸 돌인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고, 비신 위에 지붕 돌인 가첨석이 얹혀있다.(문화재청에서 발취)

 

 앞면인 동편에 신라 간신 김후직 묘(新羅諫臣金后稷墓)라 내리 쓴 글이 옴폭 새김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 무덤에 대한 내력을 적은 다음, 이는 후대에 길이 알려 모범이 될 일이므로 비를 세운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선 숙종 36년(1710)에 당시 경주부윤인 남지훈(南至熏)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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