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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남산성(南山城)에 담긴 신라인의 호국 정신

노촌魯村 2009. 2. 12. 22:14

4) 남산성(南山城)에 담긴 신라인의 호국 정신 

우리 나라는 지형 관계로 예로부터 성곽이 많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梁誠之)는 “우리 나라는 성곽(城郭)의 나라”라고 말했고,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城)을 잘 쌓고 방어를 잘하므로 쳐들어 갈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국 곳곳에 성터가 남아 있으며 “성(城)”자가 들어가는 지명도 매우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높은 산에는 산성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는 역사의 이끼가 덮인 읍성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곽의 유적은 우리 역사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수호하려는 우리 조상의 호국 정신의 표상(表像)이라 하겠다.

삼국유사 제1권 위만조선조에

「누선 장군은 제나라의 병력 7천을 거느리고 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아가 공격을 하니 누선의 군사가 패하여 도망을 했다. 양복은 군사을 잃고 산 속으로 몸을 피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좌장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쳤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라는 기록을 보아 고조선 말기에는 성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 신라는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에 금성을 쌓았다」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4년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백제는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는 기록을 보아,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쌓았고,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柵)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 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 단위로 한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성곽은 그 쌓은 재료에 따라서 흙으로 쌓은 토성, 돌을 다듬어 쌓은 석성,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토석혼성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위치에 따라 산성, 궁성 또는 왕성, 도성, 읍성, 진성, 장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신라는 한반도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남쪽으로 백제, 가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이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으며, 바다 건너 왜의 침공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동북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말갈이 수시로 침범해 왔고, 진평왕 때부터는 남으로 내려오는 고구려의 세력에 맞서 항쟁을 해야 했다. 이러한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신라는 일찍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수도 금성은 도성이 별도로 없었고, 대신 동. 서. 남. 북의 높은 산꼭대기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즉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서쪽으로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으로는 남산신성과 고허성, 북쪽으로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궁성과 남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남산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남산성지(南山城址) 및 장창지(長倉址)

해발 468m인 남산(금오산.金鰲山) 꼭대기에서 동남산과 서남산의 분수령을 타고 북쪽인 경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1Km 쯤 내려오면 금오정(金鰲亭)이라는 전망대가 있다. 이 금오정은 동쪽으로는 옻밭골과 국사곡이고 서쪽으로는 포석계의 분수령이 되는 아주 전망이 좋은 봉우리이다. 금오정에서 다시 북쪽으로 1Km 정도 내려오면,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주위에 많은 바위들이 얽혀 있는데 동쪽에 있는 높이 3.5m 정도되는 바위와 서쪽에 있는 4.5m 쯤 되는 바위는 멀리서 볼 때 게(蟹)의 눈(目)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옛날 신라부터 이 곳을 해목령(蟹目嶺, 해발 281m)이라 불러왔다고 구전(口傳)되어 온다.

해목령 봉우리는 장창곡, 윤을곡, 탑곡 등의 분수령이 되며 봉우리에 올라서서 보면 북으로 경주 시가지와 반월성이 눈 아래 보이고, 동쪽으로는 동해에서 오는 외적에 대비하여 일찍부터 산성이 축조된 명활산과 신라의 진산이요 영산인 낭산,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에 안은 토함산과 그 사이에 들판이 그림처럼 펄처있다. 서쪽으로는 김유신 장군께서 화랑 시절에 수도했다는 단석산과 서산성모의 전설을 간직한 선도산, 그 사이의 모량 골짜기와 경부고속도로가 한 시야에 다보이니 그 옛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지키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 해목령을 중심 하여 3.7Km에 이르는 성을 쌓으니, 이 성이 신라 도성의 중심이 되는 남산성이다. 남산성의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는 포곡형(包谷形)의 산성이다. 성벽에는 문이 있었던 자리가 2군데 있고 성벽에 근접한 곳에는 여러 군데 망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성안에는 물이 흘러 나갈 수 있도록 수구(水口) 시설도 여러 곳에 마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말았으나 간혹 옛 모습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가장 잘 남은 있는 곳은 신라 초기의 불상인 감실 불상이 있는 불곡 막바지 부근인데 넓적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성벽 곁에 나타나는 면들은 대략 길이 60cm, 높이 30cm의 크기로 곱게 다듬어서 쌓았으므로 곁에서 볼 때에는 벽돌로 쌓은 성처럼 보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2m정도로 추정된다.

특히 남산성은 왕성인 월성을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어 외적이 침입이 있을 때, 높은 봉우리마다 마련되어 있는 봉수대를 통하여 봉화와 연기 등의 신호로 하여 북형산성, 선도산성, 명활산성에 전해지면, 그 정보를 남산성이 받아 월성에 전하고, 월성의 명령을 남산성이 먼저 받아 명활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으로 전하면, 다시 이 곳에서 각처로 전해졌을 것이니 남산성은 신라 국방의 중심지 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남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으며 사적(史籍)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 :「신월성(新月城) 남(南)에 남산성(南山城)이 있는데 주(周) 이천팔백사 보(步)...」

삼국사기 본기 : 「진평왕 13년 추(秋) 7월 남산성을 축조했는데 주(周) 이천팔백오십사 보(步)...」

삼국사기 본기 : 「문무왕 3년 정월에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축조했다.」

삼국사기 본기 : 「문무왕 19년 남산성을 증축(增築)하였다」

여지승람(與地勝覽) : 「남산성은 토축(土築)이고 주(周) 칠천오백사십사 척(尺)...」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法敏條) : 「왕(문무왕을 가리킴)은 처음 왕위에 오르자 남산에 장창(長倉)을 설치(設置)하였는데,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였으며, 곡식과 병기를 쌓아 두었다. 이것이 우창(右倉)이다. 천은사의 서북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천은사 서북쪽에 좌창이 있다는 기록은 천은사의 동남산 위에 좌창이 있다는 말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딴 책에서는 건복(建福) 8년 신해(申亥, 서기 591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이천팔백오심보(步)라 했다. 이것은 진덕왕(眞德王,眞平王의 잘못이라 추정) 때에 처음 쌓았던 것이니, 그렇다면 이 때에 와서 다시 수리했을 것이다. 또 처음으로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는데, 3년만에 역사(役事)를 마쳤으며, 안북하(安北河)의 가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한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임원을 갖추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때 의상법사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땅을 그어서 성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어오지 못할 것이며, 재앙을 씻어 버리고 복을 오게 할 수는 있겠지마는 정치와 교화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災害)를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이에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남산성의 중요 기능이 군량미(軍糧米)와 병기(兵器)의 비축(備蓄)에 있었음을 더욱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사서(史書)에 명시되지 않은 것은 남산성의 축조 연대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남산성 축조의 시초(始初)가 진평왕 13년이다. 그러나 남산성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는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의하면 진평왕 13년에 축조된 성은 신성(新城)이다. 이것은 진평왕 13년 이전에 어떤 형태이던 간에 이미 남산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남산성안에는 문무왕 3년(663)에 지었다고 추정되는 큰 창고 터가 3군데 남아 있는데, 장창지라고 한다. 장창(長倉)이란 큰 창고라는 뜻이다. 북문터 가까이에 중창지가 있고 동쪽에는 우창지, 서쪽에는 좌창지가 있었으니, 좌.우창고는 칼, 활, 창 등의 병기를 보관하던 병기 창고였고, 중창은 군량미를 보관하던 곡식 창고로 짐작된다. 그리고 진평왕 13년(591)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을 때 공사에 참가한 사람의 이름과 담당 거리와 성을 쌓고 난 후 3년 이내에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겠다는 맹세를 적은 비석이 남산신성비이다. 이는 신라인의 강렬한 책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비석은 1934년 처음 발견 이후 9개인데 주내용은 동일하고 인명은 다르다. 1개의 집단이 성을 쌓은 거리와 전체의 거리를 대비하여 보면 적어도 200여개의 비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남산신성비는 1934년에 제1비가 처음 발견되어 일인 大坂에 의하여 학술지에 발표된 후, 1960년대 제2, 3비를 소개하였고, 그 후 제4,, 5, 6, 7, 8비가 계속 발굴되어 왔다. 최근 1994년 1월16일에는 경주시 배동 남산신성의 서쪽 성터 부근에서 거의 완전한 상태로 김동찬씨에 의하여 발견되어 경주시청 문화재과에 신고되었다. 신성비가 처음 발견된 후 제 9비가 발견되기까지 60년이 흘렀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보아 200여기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신성비의 제작 연대

남산신성비의 제작 연대는 서두부에 확실히 표시가 되어 있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13년(AD591)이다.

㉯ 신성비의 서두부(序頭部) 해설

모든 신성비의 서두부는 똑같다. 제1비의 경우 34자로 되어 있고 그 내용은다음과같다.

『신해년 2월26일 남산에 신성을 쌓는데 법대로 쌓을 것이다. 쌓은후 3년이 지나서 무너진다면

벌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명령받은 대로 성을 지을 것을 맹서한다.』

이 부분에서 신라인의 강한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읽을 수 있다, 삼국중 가장 늦게 발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호국정신이 아닐까 한다. 이 서두 부분에서 우리는 㰡’誓㰡“자 즉 ‘맹서할 서’를 보게 된다…. 하늘에 맹서하는 결심은 가장 크고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거의 같은 시대에 발견되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임신서기석(任申誓紀石)을 상기해 본다.

㉰ 임신서기석 (壬新誓記石)

임신서기석이 경주시 현곡동(見谷洞) 금장리(金丈里; 石亭)에서 발견 된 때가 남산신성비가 발견된 때와 같은 1934년으로 일치한다

임신서기석의 크기는 길이 약 34cm, 폭 약 11cm, 두께 약 2 cm의 돌에 5행, 74자가 각서 (刻書) 되어 있다. 우선,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화랑)이 합께 결심한바가 있어 서약하여 이를 돌에 새겨 천지신명 앞에 맹서하노니, 지금으로 3년 이후, 충도를 굳게 지키고, 그릇됨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만약에 나라가 불안해지고, 크게 어지러워 진다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맹서한다. 또 지난해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서약한 바 있는 시경, 상서, 예기, 춘추좌씨전을 3년 동안 차례로 터득할 것을 맹서한다.』

禮는 비석에는 ( )로 되어 있는 것을 고친 것이다. 또한 위의 글씨체는 판독하여 정자로 다시 만들어 인쇄한 것이다.

이 비석에㰡’맹서할 서㰡“ 즉㰡’誓㰡“자가 일곱 번이나 판각되어 있다.

임신년은 신라제 26대 진평왕 34년 (621)으로 본다. 신성비의 서두부 글씨체도 서약문체로서

신라의 향찰(鄕札)의 원형이다. 한자는 사용했으나 한문은 아니다. 양 서기문(誓記文)은 하늘을 두고 맹서한 내용으로 서로 유사하며 비슷한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작성 연대가 확실한점도 괄목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 서약의 내용도 현대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금석문(金石文)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학문을 배우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과 3년 동안의 천지신명께 바치는 맹서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의 나이는 15세에서 20세 전후의 젊은이일 것이고, 화랑정신 (花郞精神)이 무르익어 가던 시기가 진흥왕과 진평왕 때이고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젊은이가 전투에서 “내 일찍 법사(圓光法師)에게 용사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들었거늘 어찌 도망하여 달아날까 보냐”하고는 귀산의 아버지를 말에 태워 보내고는 추항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신에 상처를 입고 시체로 돌아오니, 진평왕이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그들을 장사 지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 5 귀산조(貴山條)에 기록되어 있는 것 등을 보건대, 세속오계를 지키고자 물러서지 않고(臨戰無退) 전사한 시대적 사명에 가득찬 화랑(花郞)들이거나 적어도 그러한 마음으로 청운의 꿈을 간직한 젊은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두 비석에서 성벽을 쌓기 위해 동원된 성인들이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모든 것을 던져 구국하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서문을 돌에 남기어 영원히 간직하였던 화랑들의 그 시대적 사명의식이 마침내 한 데 뭉쳐 승화되어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된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 경주남산 신성 제1비(第一碑)에서 제8비(第八碑). .

제1비(第一碑)는 1934년 발견되어 大坂金太郞에 의해 「慶州에서 새로 發見된 南山新城碑」(朝鮮總督府, 1934)라는 제하에 처음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이 비석의 총 한자의수는 합자 (合字)와 판독불명(判讀不明)의 글자를 합쳐 173자이다. 합자로는 一外, 一丁 등이고 판독불명의 글자수는 13자이다.

서두부(序頭部) 34자는 위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축성 연대 AD 591, 남산에 법대로 성을 쌓고 3년간 책임지겠다는 하늘에 맹세 등의 내용이다)

서두문 다음엔 차례로 직명(職名), 출신지(出身地), 성명(姓名), 관등(官等)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제 2비(第二碑)는 서두부의 내용이 제1비와 같다. 총자수는 190자이다. 합자는 二月, 小舍 , 大烏, 上干, 一伐, 一尺, 一外, 彼日 등이다. 판독불명의 글자는 6자이다.

제3비(第三碑)는 서두부는 내용이 같고, 총자수는 116자이다. 판독불명은 14자이다.

제4비(第四碑)는 58자의 파편조각이다. 합자는 一善, 上干, 一伐, 一尺, 一外, 上人 등이고, 판독불명은 4자 정도이다.

제5비(第五碑)는 44자의 파편 조각이며 그 판독문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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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비) (제6비) (제7비) (제8비)

위의 표 (제5비 ~ 제8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거의 일부분이거나 아주 작은 파편 조각임을 알 수 있다..

새로 발견된 경주남산 제9 신성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완전한 형태의 제 9 비석이 1994년 1월 경주 남산에서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처음 발견된 당시는 열번째, 비석이라고 매스컴에서 보도했으나 종래 제7비는 남산신성비가 아니고 안압지 발굴 당시 안압지의 석축임이 밝혀져, 새로 발견된 것은 제 9 비로 보고 있다.

제9비의 크기는 높이가 90cm, 두께가 18.5cm~23.5cm인, 거의 완형의 비석으로 신라의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그림2) 그내용의 판독문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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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비는 10행 155자로 되어 있으며, 예서체로서 글자가 마모된 곳이 많다.

이 비석의 판독은 경주박물관 박방용(朴方龍)의 석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서두부

이 내용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신성의 축성 연대(591)와 성을 튼튼히 규정대로 지을 것이

라는 내용이다. 34자로 되어 있다.

㉯ 동원인원과 축성거리

동원 인원은 12명이고 축성 거리는 6보(1.2m*6=7.2m)이다.

㉰ 직명(職名)

제9비에 나타난 직명은 열 가지로 나타나 있다.

◆군상인(郡上人)

이 비석에 나타난 최고책임자의 직책이다.

제2비에는 군중상인(郡中上人) 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군중상인의 약칭으로 보인다

군상인의 직책은 두 명인데 출생지는 다르다. 이름이 예안지(曳安知)는 출생지가 이동성(伊同城)이고 벼슬이 찬간(撰干), 지방 5급 관리이다,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분(文)이며, 출생지는 생별촌(生伐村)이고, 관등이 상간(上干)이며 경외(京外) 6급이다.

◆장척(匠尺)

기능직으로 두사람이 같은(同村) 근곡촌(斤谷村)출신이다

한 사람의 이름은 내정(內丁)이고, 관등이 상간(上干) 6급이다. 또 한 사람은 이름이 령리지(另利支)이며 같은 장척(匠尺)이지만 관등이 일척(一尺) 9급이다. 이와 같이 동일 직책이지만 나이나 서열에 따라 관등과 급수가 다른 경우가 있다.

◆문척(文尺)

제9비에는 문척(文尺)의 직책을 가진 사람의 이름은 지차장(只次丈)이고 출생지는 생벌(生伐) 이며 관등은 일벌(一伐), 지방 8급이다. 또 한 사람의 출생지는 이동촌(伊同村)이며 이름은 ?차혜(?次兮), 관등은 아척(阿尺), 급수는 11급이다. 직책은 같으나 관등과 급수가 다른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이 서열등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성촉상인(城促上人)

이 직책은 성을 쌓는 현장의 실무책임자인 것 같다. 출신지는 이동촌(伊同村)이고 이름은 ?호정 (?戶丁), 관등은 일벌(一伐), 8급이다

성촉상인 아래 공척(工尺), 서열이 같은 문척중 낮은 면촉(面促), 면착(面捉), 일외척인(一外捉人), 소석착인(小石捉人) 등이 있다.

◆공척(工尺)

축성의 실무직으로 촐신지는 지대요촌(指大么村)이고, 이름은 입부? (入夫?), 관등명은 일벌(一伐)이며, 8급이다

◆문척(文尺)

. 이 직책을 가진 사람이 두명 있다. 8급 과11급 지방직이다. 직책은 같으나 나이, 서열 등에 따라 관등과 급수가 다르다.

출신지가 생별(生伐)이고, 이름은 지차장(只次丈), 관등이 일벌(一伐)이고 8급이다. 같은 문척이지만 출신지는 이동촌(伊同村)이고, 이름은 ?차혜 ( ?次兮)이고 관등은 아척(阿尺)이며, 11급이다.

◆면촉 또는 면착 (面促,面捉)

제1비에는 면착상(面捉上), 제2비에는 면석상인(面石上人). 제3비에는 면석착인(面石捉人)임을 볼 때 약자를 사용하여 면촉또는 면착이라고 한 것 같다.

출신지가 백간지촌(伯干支村)인 지도(只刀)는 관등이 일척(一尺)이고 9등급이다. 같은 지역(同村)출신인 서서(西西)는 관등이 아척(阿尺)이고 11등급이다.

◆일외착인 (一外捉人)

가장 신분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일외착인과 소석착인(小石捉人)의 관등과 등급은 알 수 없다.

다만 출신지가 이동성(伊同城)이라는 것 외는 성명, 관등, 등급 등은 마멸이 심하여 판독할 수 없다.

◆소석착인(小石捉人)

출신지는 백간지촌(伯干支村)이고 이름은 무칠(戊七)이다.

이상 살펴본 것이 직책(職責)에 관한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비석이 발견되면 더욱상세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 경주 남산 신성 제9비 전문 해석(全文解析}

『신해년 (진평왕 13년 서기 591) 2월 26일 남산신성을 법대로 쌓는다.

쌓은 후 3년이 지나서 무너진다면 벌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명령받은 대로 성을 지을 것을 맹서한다.

급벌군(지금의 경북영풍군)부근의 이동성에사는 군상인(郡上人), 예안지(曳安支)를 중심으로 12 명이 6보( 7.2 m )를 축성하였다. 군상인(郡上人)직책의 예안지는 관등이 찬간(撰干)이다.

같은 군상인의 생벌성(生伐城)출신의 문(文)은 상간(上干)이다.

장척(丈尺)직책의 같은 지방출신(同村) 내정(內丁)은 관등이 상간이다.

같은 장척의 근곡촌(斤谷村) 출신의 령리지(另利支)는 관등이 일척(一尺)이다.

문척(文尺)직의 생벌(生伐)출신의 이름이 지차장(只次丈)은 관등이 일벌(一伐)이고 8등급이다. 성촉상인(城促上人)직의 이동촌(伊同村)출신인 ?호정 (?戶丁)은 관등이 상간(上干)이고 6등급이 며 성(城)을 쌓는 실부직중 최고 책임자이다.

직책이 공척(工尺)인 지대요촌(持大么村)출신의 입부? (入夫?)는 관등이 일벌(一伐)이다.

위의 같은 문척직(職)인 이동성(伊同城)출신인 ?차혜(?次兮)는 관등이 아척(阿尺)이다.

면촉(面促)직의 백간지촌(伯干支村)출신의 지도 (支刀)는 관등이 일척(一尺)이다.

면착(面捉)직의 같은 지방 출신(同村)의 서서(西西)는 관등이 아척(阿尺)이다.

일외착인(一外捉人)의 이동촌(伊同村)출신의 ? ?는 관등, 급수등은 알 수가 없다.

소석착인(小石捉人)의 백간지촌(伯干支村)출신의 무칠(戊七)도 관등 급수등을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전문(全文)을 살펴보았는데 고 신라 금석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판각의 순서는 대체적으로 직명 → 출신지 → 성명 → 관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제 9비의 특징을 살펴보면 왕경출신(王京出身)이 동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1비에 나타난 직명, 즉 아양라두(阿良邏頭),노함도사(奴含道使),영고도사(營沽道使),아단혜촌도사(阿旦兮村道使),구리성도사(仇利城道使),답대지촌도사(答大支村道使),등의 직명이 보이지않는 것이다. 또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사회(沙회) 모회(牟 ), 관등의 대사(大舍) ,소사(小舍),대오(大烏)등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축성거리도 6보로 제일 짧다. 제1비가 11보 3척 8촌이고, 제 2비는 7보 4척이며, 제3비는 21보 1촌이다.

“.... “....... ” “.............” 〈제 1 비〉 〈 제 2 비〉 〈 제 3 비〉

그리고 제1비 ,제2비 , 제3비. 제9비만 완형 (完形)이고 나머지 4,5,6,7,8비는 일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경주 남산 신성비중 제1비에서 제6비까지는 남산신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고, 제7비와 제8비만이 성안에서 파편 조각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1994년 1월에 내성벽 자리에서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당시의 모습은 성안쪽에서 비문을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출토된 장소를 깊이파 보니 많은 기와 조각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부근에 목조로 된 망루(望樓)가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한다.

또한 제9비가 다른 비와 다른 것은 급벌군(伋伐郡)이라는 새로운 군(郡)이 발견되었으며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급벌군은 고구려 영토였다는 점에서 순흥, 지금의 경상도 영풍군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소백산맥(小白山脈)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동촌(同村)이라는 지명이다. 이는 앞에 기록한 사람과 출신지가 같을 경우에는 동촌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성(성)과 촌(촌)이 구별없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신라 중․고기 (中 古期)에는 성이나 군이 대등하게 취급되었고 군(郡)아래 성이나 촌이 있었는 것 같다

경주 남산에는 4개소의 성이 있는데 도당산토성(都堂山土城), 남산토성(南山土城), 남산신성(南山新城), 고허성(高墟城)이다. 이중에서 남산신성이 가장 문헌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그러면 신성(新城)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진홍섭(秦弘燮)은 원래의 남산성 이외에 별개의 남산성을 축성했다는 설과 기존의 남산토성에 진평왕13년 때 다시 증축하여 신성이라고 칭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원래의 남산토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개축했으므로 명칭을 신성(新城)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부언하면 원래의 구성(舊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신성이라고 한 것 같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제 26대 진평왕은 여러 곳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13년에는 남산성(둘레 2854보), 15년에는 명활성(둘레 3천보)과 서형산성(둘레 2천보)를 축성했고 동왕48년에는 고호성을 쌓았다고 나타나있다.

〔三國史記 卷 4 新羅本紀 第 4 眞平王條, 眞平王; 13年 築南山城,周二千八百五十四步.

15年 改築明活城,周 三千步. 西兄山城, 周 二千步. 48年 築高墟城〕

그러면 왜 진평왕은 이렇게 성을쌓는데 힘을쏟았을까? 삼국사기등을 살펴보면 11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끊임없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한시도 편할날이 없음을 우리는 고문헌(古文獻)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진평왕 7년 3월 가뭄, 11년 7월 낙동강 대홍수로 2백여명 사망, 24년 백제 아막성 침공(侵攻)으로 귀산과 추항(貴山,箒項) 사망 , 25년 고구려 북한산성 침공, 30년 고구려 침공으로 8천여명 포로로 잡혀감, 38년 백제 모산성 침공, 40년 벡제와의 전쟁. 46년 벡제, 47년 고구려 침공, 48년 8월 백제 침공, 49년,50년 백제 침공, 51년 고구려 침공 등이다. 】

이러한 불안한 국내 사정과 위기 상황에서 진평왕은 축성(築城)에 힘을 쏟았을 것은 당연한 처사 일 것이다.

〔七年, 旱. 11年, 秋七月, 國西大水, 死者二百與人. 24年,百濟來攻阿莫城, 貴山 箒項死. 25年, 高句麗侵北漢山城. 30年, 高句麗侵北境,虜獲八千人. 38年,百濟來功母山城. 40年, 發兵與百濟. 46年,百濟兵來圍我速含. 47年,高句麗, 且數侵入. 48年,八月,百濟攻主在城. 49年, 50年 百濟來攻. 51年,侵高句麗娘臂城.〕

한반도에는 수많은 성곽(城郭)이 존재 하고 있어 <성곽의 나라>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곽의 연구는 일인 학자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경주 남산신성의 연구 논문 역시 일인 今西龍이 1933년, ‘신라사신구(新羅史硏究)’에서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그후 1957년 秦弘燮, 1968년 李蘭映, 1974년 李種旭, 1979년 향토사학자 尹京烈, 1980년 李元根, 1983년 金昌鎬, 1984 許興植, 1988-1991까지 韓國古代史硏究會, 1992년 李明植 등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남산신성은 왕성 즉 반월성 가까이에서 일단 유사시를 대비한 일종의 왕실 직속 보조성곽의 기능을 하지 않았나 한다.(삼국사기; 권 제 32 잡지 제1 …신성 북문에서 여덟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풍년에는 큰 소를 쓰고… ,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 강수조에는……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에서 받는 벼 백 섬씩을 주게 하였다……)

신성에는 부기를 보관해 두었던 동창지와 서창지 그리고 곡식을 보관했던 중창지가 고상식(高床式)건축 방식으로 세워졌던 창고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성비의 발견과 그 비석에 새겨진 내용이다.

확실한 축성 연대(591)와 그 당시의 신분 관계, 동원 방법, 지명, 이름 등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임신서기석과 비교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공통점은 문체(文體)의 유사성과 향찰(鄕札), 그리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맹서문(盟誓文)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쌓은 성이 삼년 안에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겠다.」「……後三年棚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는 서약은 그 당시 신라인들의 투철한 사명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신서기석에는 「지금으로부터 삼년 이후, 충도를 굳게 지키고, 그릇됨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또한 나라가 불안해지고, 크게 어지러워진다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서한다.」

「今自 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尤誓若此事失天大罪得誓若國不安大亂世可容……」

위의 남산신성비문 중 서두문의 내용은 축성에 동원된 성인들의 서약문이고 임신서기석은 청소년들의 맹서문이다. 이 글을 보면서 모든 신라인들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변치않는 돌에 새겨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간직하겠다는 마음의 자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은 흘렀으나 그들의 맹서는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남아 살아 있을 것이며, 또한 후세에 더욱 널리 전해 줄 사명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3) 우창지(右倉址, 동창)

해목령에서 큰골과 탑곡의 분수령을 타고 북쪽으로 600m 쯤 내려오면 불곡 막바지에서 산맥은 세 갈래로 갈아지며 큰 산어덕을 이른다. 이 세 갈래의 언덕 위에 각각 창고터(倉址)가 있으니 동쪽의 것은 우창(右倉,동창)이고, 서쪽의 것은 좌창(左倉,서창)이다. 가운데 것은 중창(中倉)이다.

우창터는 남산성 동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서쪽으로 향해서 세워진 건물이며, 주춧돌의 간격과 크기로 보아 50m×17m으로 약 250평 정도이다. 터 가운데 길이가 6m이고 너비가 5m, 높이가 약 1m 정도 되는 바위와 다섯 개의 기둥 자리와 두 곳의 부틀(널빤지 밑에 가로놓은 굵은 나무)이 놓였던 홈이 패어져 있는 큰돌이 중간에 놓여 있어 약 1.5m 정도의 높이로 널마루를 깔고 그 위에 세운 다락집 형태의 창고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습기로부터 무기의 녹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고 밑으로 바람이 통하록 한 신라인의 슬기로운 지혜로 생각된다.

(4) 중창지(中倉址)

좌창지에서 약 100m 서쪽에 절골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평평한 언덕 위에 동서로 가로놓인 큰 터가 있다. 좌창지보다 약간 낮은 지대이다. 107m×23m로 약 745평 정도의 창고이며 서쪽 부근의 비탈에 탄화(炭化)된 쌀과 보리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를 미루어 보아 군량미를 저장했던 창고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중창은 약 4천톤의 미곡를 보관할 수 있고, 일만 명의 군사가 50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거대한 식량의 창고이었다.

서쪽면에 약간의 축대가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고, 2.25m 간격으로 길이 1.45m 되는 긴 돌 못을 볼 수 있다. 이 돌 못은 축대를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러한 석축 법은 더욱 발전하여 감은사와 불국사의 축대로 발전하였고, 마침내는 석굴암의 아아치형(型) 천장에 사용되어 교묘하게 쌓여진 석재(石材)에 의해 실로 아름다운 조화와 기교의 묘미(妙味)를 나타내고, 성덕왕 이후에는 왕릉에도 이용되어 신라 석축(石築)의 예술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것이다.

(5) 좌창지(左倉址, 서창)

중창지의 서남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있다. 45m×15m으로 약 200평 규모의 창고이다. 우뚝 솟은 봉우리에 건축된 이 좌창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우창과 같이 병기의 창고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 본기 권 제9 혜공왕 4년조에 의하면

가을 7월에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지어 33일간 왕궁을 둘러 쌓더니 왕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다 죽였다.」

삼국유사 권2 혜공왕조의 기록을 보면

「7월 3일 각간 대공이 적도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와 5도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 각간이 죽고 그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 등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이 불에 타므로 사량,모량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 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위의 두 기록에 의하면 남산성의 장창이 혜공왕 4년(768)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 또는 국가가 그 구성원들이 유비무환의 정신이 강하였을 때는 그 집단이 크게 융성하고 어떤 위기에서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유비무환의 정신이 해이해지면 조그마한 위기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조상이 물려 준 수많은 유산이 있다. 그 유물 유적들 중에는 우리 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 하나가 역사의 매듭이요,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다.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 속에서 외적을 막아 우리의 아름다운 강토를 보존하려 했던 조상들의 호국 의지(護國 意志)를 느낄 수 있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도 되새기어 볼 수 있다.

인구가 많지 않아 노동력이 적었고, 특별한 장비가 없었던 그 시대에 대규모의 성을 쌓는다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산성을 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피눈물과 땀의 결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허물어진 성벽의 돌덩이 하나, 기와 한 조각에서도 조상들의 호국 의지와 국토 수호(國土 守護)에 대한 무언(無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특히 신라 도성 수비를 완벽하게 해 주는 역할 한 남산성에서는 축성 공사가 끝난 뒤 돌에다 책임을 다한다는 맹세의 말을 새기어, 축성 공사에 종사한 사람이 성을 축조하는 강한 책임감과 투철한 사명 의식의 마음가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병기 창고와 군량미 창고가 견고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주춧돌과 축대를 보면 짐작 할 수 있고, 그 위치와 저장 방법에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건축하였는지 실감할 수 있고, 신라인의 국가 위기에 대한 준비심을 읽을 수 있다.

허물어진 성벽의 돌 하나가 우리에게는 귀중한 유적이요, 위대한 조상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라는 점을 인식하여 보존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겠다.

 

 해목령

 남산성의 기와편(남문 부근)

 

 제1비

 제2비

제3비

 제4비

 제5비

 제7비

 제8비

 제9비

 제9비 발견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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