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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삼화령(三花嶺)

노촌魯村 2009. 2. 12. 22:16

 

삼화령(三花嶺)

경주남산에 삼화령이 있었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두 가지 주장이 있다.

* 하나는 장창골 부근에서 삼화령을 찾고자 하는 주장으로 이것은 이 부근에서 삼화령에 있던 생의사의 돌미륵이라 여겨지는 미륵삼존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발견 당시의 모습 

 

 

 

 

* 다른 하나의 주장은 금오산 정상의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용장계곡 부근의 산마루에 이르면 큰 연화대좌가 있는데 이곳을 삼화령이라 보는 견해이다. 큰 연화대좌는 생의사 미륵불의 대좌로 볼 수 있으며 이곳은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에서 가장 높은 영마루이기 때문이다.

 

 

일정시의 사진 : 연화대좌 위에 파불이 있음

 

삼화령에는 선덕여왕때 생의(生義)스님의 미륵불을 모시고 생의사(生義寺)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2에 보면 경덕왕때 화랑출신으로 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忠談師)가 생의사의 미륵불을 공양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 일이었다. 왕은 어느 날 대궐 서쪽에 있는 귀정문(歸正門) 문루(門樓)에 올라 신하들에게 말했다. 누가 뜻과 예절을 갖춘 스님 한 분을 모셔을 수 없겠는가? 때 마침 깨끗한 차림으로 지나가는 스님이 있었다. 신하들은 저 스님을 모셔오리잇까? 하고 왕께 여쭈었으나 왕은 머리를 가로 저으셨다. 조금 후에 검소한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삼태기를 메고 남산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그를 보고 누(樓) 위로 불러오라 하였다. 승려의 삼태기 속에는 풍로며 사발 등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 대는 누구요? "

"충담이라 하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저는 해마다 3월 3진날과 9월 9일이 되면 남산 삼화령 미륵 세존께 차를 다려 공양하여 왔습니다. 오늘이 3월 3진날이기에 차(茶)를 공양하여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그 차를 나에게도 한 잔 줄 수 있겠는가?"하고 왕이 차를 청하였다.

스님이 향로에 불을 피워 차를 다려 바치니 사발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그 맛이 신비로웠다. 차를 마시고 나서.

“내 들으니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향가(鄕歌)가 그 뜻이 높다는데 스님은 그 가사를 지으신 분이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하다는 대답을 들은 왕은

"그러하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평안히 할 가사를 한 수 지어 주시구려"

하며 향가의 가사를 부탁하였다

충담스님은 그 자리에서 가사를 지어 바쳤는데 그 노래는 아래와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자애 깊은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로구나 ! 하고 여기시면 백성이 사랑 받는 것을 스스로 알리리다.

꿈실거리며 사는 백성이

사랑을 먹고 스스로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나라안이 되어 감을 가히 알리리다.

아-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안은 태평한 것이나이다.”

왕은 그 노래를 듣고 기뻐하여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다. 그러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절하고 가 버렸다.

安民歌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盻生以支所音物生

此盻喰惡支治良羅

此地盻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說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 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

승려로서 가장 영예로운 왕사의 자리도 일찍이 화랑의 풍류를 익혔던 충담사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화랑 기파랑을 노래한 찬기파랑는 경덕왕도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평하였지만 충담사가 화랑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이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화알짝 열어 재치며

나타난 달아

흰구름 따라 가는 곳 어딘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얼굴이 비치었네

일오(逸烏) 냇가의 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조차 모르실 화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