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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흥륜사(興輪寺)터

노촌魯村 2009. 2. 12. 22:17

6) 흥륜사(興輪寺)터

 

흥륜사터(현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 

흥륜사터는 고속버스로 경주에 들어오면 오릉(五陵)을 지나 남천을 넘는 금성로 동편에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의 확장공사 때 대규모의 건축지가 발견되어 이 곳을 흥륜사터로 보는 설이 더 유력하다. 서라벌에서 최초로 아도(阿道)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 후 이 절에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부터 진흥왕까지 걸쳐 크게 중건되어 7처가람의 하나가 되었다.

진지왕때 흥륜사의 진자(眞慈)스님은 법당안에 모셔 놓은 미륵상 앞에서 빌었다. “미륵 부처님께서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면 제가 가까이 받들겠습니다.”하고 간곡하게 기원하는 정성이 나날이 두터워지더니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네가 웅천(지금의 충남 공주)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화랑을 볼 수 있으리라”하였다. 그는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동안 걸어가면서 한 발자국 옮기면서 절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절 문 밖에서 인물이 준수한 한 소년이 반가이 맞으면서 안내하여 객실에 들어갔다.

“나는 그대를 처음 만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맙네.”

“저 역시 서라벌 사람으로 스님이 먼 곳에서 오셨으니 위로하고 영접했을 뿐입니다.” 소년은 잠시 후 나가서 사라져버렸다.

진자스님은 스님들에게 자기가 온 내력을 이야기했으나, 이 절의 스님들이 미륵화랑은 이 절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진자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진지하니 한 스님이 듣고,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이 머물러 있다하니 그 곳에 찾아가서 알아보시오”했다. 진자스님은 그의 말대로 천산에 이르니 한 노인이 “전에 수원사 문 밖에서 미륵화랑을 보았는데 이 곳에서 와서 찾으면 무얼 하겠소?”하였다. 진자스님이 성급히 수원사에 다시 가서 그 소년을 만나려 하였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흥륜사로 돌아왔다.

진지왕이 그 소문을 듣고, “낭이 서라벌 사람이라 하였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성 안을 찾아보지 않소?”하였다. 진자스님은 왕의 뜻을 받아들여 무리를 모아 온 도성 안을 뒤지며 미륵화랑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 가 나무 밑에서 미모가 수려한 소년이 놀고 있었다. 진자스님이 가서보니 이 소년이 바로 수원사에서 본 미륵화랑이었다. 이 소년은 성은 모르고 이름은 미시(未尸)라 했다. 왕은 미시를 국선으로 삼았다. 그는 낭도들과 화목하고 예의와 풍류로 뛰어 났으나 국선이 된 지 7년만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미시랑의 미(未)는 미륵불이라는 미(彌)와 음이 같고 시(尸)는 륵(勒)자의 역(力)과 글자가 비슷하므로 미륵부처님이 화랑으로 나타난 것으로 믿었다.

미륵부처님이 화랑으로 화신했다는 이 설화는 삼국유사 권3흥법조에 있는 내용으로 이것은 화랑정신과 미륵정신과의 깊은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화랑들의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6,7세기에는 많은 화랑들이 미래의 이상세계를 미륵불 신앙에서 찾고자 했다. 나라가 위태롭고 전쟁이 그치지 않았을 때 화랑들은 다투어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였다. 그칠 사이 없이 전쟁을 치루면서 희구하던 화평과 복록(福祿)의 이상세계는 미륵불세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