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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벌지지(伐知旨, 양지버들)와 장사(長沙)

노촌魯村 2009. 2. 12. 22:11

3) 벌지지(伐知旨, 양지버들)와 장사(長沙)

 

 

 

 

화랑교육원에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을 지나면 문천(蚊川 : 남천)을 건너가는 화랑교(花郞橋)가 있다. 여기에서 남쪽을 보면 논 가운데 당간지주와 목탑지 그리고 금당터가 남아 있는 망덕사터가 있다. 이 망덕사터 앞의 들판을 벌지지(伐知旨) 즉 ‘양지버들’이라 하며 그 일대의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벌지지와 장사의 명칭은 충산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의 애틋한 일화에서 연유한다. 눌지왕 때의 충신인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서 인질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복호를 갖은 난관 끝에 구해서 돌아왔다. 눌지왕은 아우 복호를 만나 매우 기뻤으나, 한편으로 왜국에 있는 다른 아우인 미사흔을 보고 싶은 심정은 더욱 간절해 졌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되찾아. 데러오는 일은 목숨을 건 일이며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임을 알고 굳 왜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집에 들리지도 않고 눌지왕께 하직 인사를 하고 바로 왜국으로 출발하였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일 지도 몰랐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은 길에서라도 생전에 남편의 얼굴이나 보려고 달려 나왔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떠난 뒤였다. 부인은 뒤 따르다 지쳐 문천의 모래 위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다. 이 곳의 긴 모래사장을 후세 사람이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부인은 울다가 몸을 일으켰다. 율포까지 뒤쫓아서라도 한번 남편의 모습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감에 지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후일 이 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벌지지의 들판을 ‘양지버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 두 다리 뻗음’의 뜻이라 한다.

현재의 문천(蚊川)은 높은 제방이 있어서, 옛 장사(長沙)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래사장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곳에 서면, 박제상의 충절과 그 부인의 높은 정절을 되새기게 된다. 이러한 충절과 정절이 화랑정신의 모태일 것이다. 박제상의 시대는 화랑도가 제도화되기 전이었으나 신라에는 독자적인 정신세계가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바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였다.

“나는 죽여서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다.”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고 새잎 위를 걷게 해도, 벌겋게 달군 쇠덩이 위에 세워져도 박제상은 당당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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