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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포석정(鮑石亭)

노촌魯村 2009. 2. 12. 22:19

포석정(鮑石亭) 

포석정 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머무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인 것이다. 대궐에는 놀이터로서 안압지가 있었지마는 큰 산, 큰 내에서 수양을 쌓은 신라 귀족들에겐 성미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부흥 계곡을 환락의 터전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던 모양인데 지금 여러 건물터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오직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개울가에 솟은 바위 위에 자리잡은 포석정의 돌홈뿐이다.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어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이다. 돌홈 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鮑)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이라 부르는 것이라 한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흘러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흐르다가 어느 곳에서는 빙글빙글 돌아서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면서 흘렀을 것을 돌홈의 곡선으로써 알 수 있다. 나라 돌보기에 지치신 임금님께서 맑은 하늘을 지붕 삼아 포석정에 술잔을 피워 놓고 손발처럼 아까는 신하들과 둘러앉아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시던 포석정이다. 악사들의 손가락 끝으로 흘러나오는 풍류에 맞춰 궁녀들의 은빛 요패(腰佩)가 반짝이며 오색 한삼이 무지개를 이를 때 산들바람에 쏟아지는 꽃잎들이 나비처럼 날아와 흘러가는 물위에 술잔과 같이 춤추며 흐르는 가운데서 임금과 신하들은 지친 시름을 흘려 보냈던 것이다. 일을 하고 휴식을 즐기는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베푼 크나큰 은총인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멋진 풍류의 자리에서 신라 천년의 종말을 내리는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때의 일이다. 경애왕 4년(927)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의 영천(永川)까지 쳐들어 왔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일기 시작하는 왕권 쟁탈 싸움과 신하들의 사치와 쾌락으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방에서 도적 떼가 일더니 마침내는 신라의 북쪽 땅은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이 차지하고 서쪽은 후백제의 견훤이 차지하여 서로 통일을 노리고 싸우기에 숨쉴 겨를도 없던 때였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 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과 그 아내들이 모여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어 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습격하여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이궁의 어느 궁전으로 숨어 버렸다. 도망가던 신하들은 모두 붙잡혀 그 자리에 엎드려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성난 견훤의 손에 이슬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으니 그 참담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서울 안에 군사들을 놓아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을 종으로 잡아가고 재주 있는 사람을 모두 잡아갔으니 그 영화롭던 신라는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던 것이다. 견훤은 김부(金傅)를 왕위에 앉혀 놓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지친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 천년의 종막을 내리게 한 장소가 포석정이라서 포석정은 언제나 원한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계림에 누렇게 단풍들어 楓葉鷄林 己改柯

견훤이 신라를 망쳤단 말인가 甄萱不是 滅新羅

포석정이 도적을 불러들이어 鮑石自召 丘代

그르쳐 놓은 일을 어찌하랴? 到此君臣 武計何

군신들인들 ............

이상은 16세기 학자인 조식(曺植 1501-1572)이 포석정을 옳은 시다.

 

 

하느님이시여 귀신을 시켜 이 돌 홈을 지키게 하여 뒷사람들께 보여주소 거울 삼아서--」이상은 15세기 학자인 조위(曺偉 1454-1503)의 시 포석정의 한 구절이다.

마시고 노는데 열중하면 결과는 망하는 것뿐이니 포석정을 그 본보기로 삼자는 뜻이리라. 이 글들을 보면 마치 포석정 때문에 신라가 망한 것처럼 생각들하고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포석정이 비록 귀족들의 놀이터라 하나 그 위치가 바로 남산성(南山城) 밑에 있다. 남산성은 당시 나라를 지키는 중심부였으니 임금님께서 남산성을 순시하시고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충신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포석정에서 베풀었을 것이니 포석정은 남산성의 휴게실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죄가 있다면 나라를 보살피지 않고 향락과 쾌락에 취해서 밤낮으로 포석정 놀이에서 깰 줄 몰랐던 경애왕에게 있지 포석정에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곳은 단순한 놀이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건전한 풍류를 통하여 성장해갔던 화랑들의 수련지였다. 삼국통일기에는 포석정의 풍류가 화랑들의 기상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문무왕 때 포석정 아래 충렬사를 세웠다는 기록은 포석정의 다른 일면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이 충렬사에는 삼국통일을 위해 몸바친 화랑들과 충신을 모시게 하였다. 여기에는 박제상, 김찬덕, 해론, 김흠운, 설두, 김품석, 관창, 김반굴, 온군해, 김의문, 죽죽, 취항, 용석, 예파, 부과 등이었다. 충신 열사들을 모신 가운데 즐기던 풍류는 삼국통일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문무왕때 당나라 사신을 맞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당나라 사신은 오만 불손하여 관원들에 대한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 때 취선사에 머물던 김유신장군은 왕명을 받고 급히 포석정으로 달려 왔다. 김유신 장군은 여러 관원의 영접을 받으며 연회 석상에 나타났다. 당나라 사신은 위엄에 찬 장군을 보자 황급히 마루에서 내려와 공손히 배례하고 말하기를 “남유(南維)의 진성(鎭星)(24宿의 하나인 큰 별 : 김유신장군을 큰 별에 비유함)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이제 여기서 뵈옵게 되니 개국공이 아니십니까?”하며 어지할 바를 몰랐으며 이제까지의 그 오만함이 간곳 없이 사라졌다 한다. 이 포석정이 화랑출신의 김유신장군의 기개로 돋보인 장면이다.

효종랑(孝宗郞)은 포석정에서 그의 낭도들을 모아 마음과 몸을 단련하는 행사를 가진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낭도 중 두 사람이 늦게 참석하였다. 효종랑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효녀 지은(知恩)의 이야기를 하였다. 낭도들이 지은의 효성에 감동되어 도왔다고 한다. 포석정이 화랑의 수돚당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포석정의 돌홈엔 굽이굽이 흘러가는 우리 겨레의 멋진 가락이 있다. 수 십 만년 씻겨 내린 돌처럼 부드럽게 다듬은 그 조각 솜씨도 훌륭하거니와 놀이에 있어서도 그 풍류는 멋에 넘치는 것이니 포석정은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유적인 것이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49대 헌강왕(憲康王 876 -886)이 포석정에 행차하셨을 때에 남산의 신(神)이 임금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신(神)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임금 자신이 신의 추는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유행되었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다(삼국유사의 기록)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 이후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雁鴨池)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돌거북의 입으로 물이 쏟아져서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그 돌거북은 조선 말엽에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집 정원에 놓아두었다 하기도 하고 자기 조상 비석 대석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이 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 자리가 있는데 그 곳이 포석정의 수원지였을 것이라 전해지고 북쪽 개울 건너 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하는데 모두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한다.

 

 

포석정 주악사

최 광유

기원사 실제사 화려한 두 절

동서로 서 있는데

그 가운데 자리잡고 포석정이 있다네

소나무 잣나무 서로 어려 무성한데

넝쿨은 온통 하늘을 덮었어라

머리를 돌리는 곳마다 진달래꽃 피고 피어

짙 붉은 웃음 골짜기에 가득 차 넘네

으스름 실안개는 서기처럼 자욱히 빗겨 있는데 ....

鮑石亭 奏樂詞

崔匡裕

祈園實際己兮 二寺東西

松柏 相倚兮 蘿洞中

回首一望兮 塢花滿

細霧輕雲兮 並朦朧

이상은 경문왕(861-875)시대 당나라에 가서 시인으로 명성이 높던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최광유의 시다. 이 시에는 포석정 부근의 아름답던 주위 환경과 포석정 정경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시를 통해 그림 같은 격조 높은 아름다움 속에 포석정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화랑광장 부근의 포석정 모형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화랑광장 부근의 포석정 모형(거북의 입을 통하여 곡수구에 물이 들아옴)

 

 

 

 포석정지 내의 우물 

 

 포석정지의 일정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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