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화랑유적지

거열성(居列城)

노촌魯村 2009. 2. 12. 23:00

7) 거열성(居列城)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동(上洞)에 있는 거열성(居列城)은 백제가 멸망된 후, 그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벌이면서 쌓은 성이다. 둘레 약 2km, 높이 3m, 폭5m의 석성이다. 덕유산,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구축된 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이 성안에는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굴이 있고 샘물도 솟아나고 있다고 한다. 백제 멸망 후 3년 동안 항전을 하였으나, 태종무열왕 3년(663) 2월 흠순(欽純), 천존(天存) 등이 이 성을 공략하였다. 성문은 서쪽에 있으며, 성문 앞에는 옛 도로의 흔적이 성벽과 함께 아직도 남아있다. 망루가 섰던 곳으로 짐작되는 터에는 벽돌과 붉은 색 기와 조각이 이따금 출토된다.

거열성이 있었던 거열주(현재의 거창)는 김유신장군의 아들 원술랑(元述郞)에게는 한이 맺힌 곳이다. 문무왕 12년(672) 당과 말갈의 군대가 석문(石門)에서 병영을 치니 신라군도 대방(帶方)으로 나가 이를 막았다. 이 싸움에 원술은 비장(裨將)이 되어 출전했는데 치열한 사투 끝에 신라군은 크게 패하였다. 원술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이곳이 목숨을 바칠 곳임을 감지하고 결연히 말에 올랐다. 그러나 이 때 부관인 담릉(談凌)이 말고삐를 굳게 잡고 놓지 않으며 만류하여 명예롭게 싸워 죽는 기회를 놓쳤다. 신라군은 걷잡을 수없이 패퇴하였고 원술도 상장군을 따라 거열주에 이르렀다. 거열주 대감 아진함(阿珍含)은 상장군에게 이르기를 “공(公) 등은 빨리 달아나시오. 나는 이미 70세가 되었으니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이 때야말로 내가 죽을 날이오.”하며 적을 막아 싸우며 전사하니, 그 아들도 뒤따라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거열주에서 아진함 부자가 장렬한 최후를 맞는 동안 신라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원술은 퇴각하는 군사들의 무리에 끼어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김유신장군은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한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화랑들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것인가를 생각하면 대장군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유신장군은 부자간의 인연을 끓어 버렸다. 원술은 견딜 수 없는 굴욕감에 몸부림치며 평생을 얼굴을 감추고 숨어 살아야 했다. 후일 김유신장군이 별세하자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어머니로부터도 끝내 외면 당하고 말아 평생을 한탄 속에 보내어야 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23,00220000,38&queryText=(`거열성`)<in>(z_title,z_content)

'화랑유적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종대(太宗臺)  (0) 2009.02.12
영랑재(永郞재)  (0) 2009.02.12
대야성(大耶城)  (0) 2009.02.12
창녕비(昌寧碑)  (0) 2009.02.12
반구대(盤龜臺)  (0) 200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