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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대야성(大耶城)

노촌魯村 2009. 2. 12. 22:59

6) 대야성(大耶城)

 

 

대야성(大耶城)은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황강변의 나직한 산봉우리에 위치한 토성이다. 이 성의 성벽은 산비탈을 깎아내려 가파르게 만든 삭도법을 써서 다듬었으며 현재의 높이는 약 1m 정도이다. 진흥왕 23년(562)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평정하고 나서 이곳을 요새로 삼고 도독을 두어 다스리게 한 곳이다. 이 성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는 접전이 매우 잦았다.

선덕여왕 11년(642)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대야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의 병기 창고를 불사르고 백제군과 내통하여 함께 침공해 오니 성안은 삽시간에 수라장

이 되었다. 신라군의 패색이 단번에 짙어졌다. 대야성의 도독은 김품석(金品釋)으로 후일 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이기도 했다. 품석의 한 막료가 성 위로 올라가서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을 하껬다.”고 고함을 지르니 윤충이 즉시 이를 수락했다.

그는 품석에게 윤충의 응답을 내세워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 때 죽죽(竹竹)은 이를 듣고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을 것을 역설하였다. 죽죽은 대야주(大耶州) 사람으로 선덕여왕때사지(舍知)가 되어 김품석의 막료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품석은 죽죽의 말을 듣지 않고 곧 성문을 열게 하여 사졸(士卒)들을 먼저 내보내게하니 나가는 자 마다 복병에게 모두 죽고 말았다. 품석은 그제서야 죽죽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급기야 처자들을 먼저 죽인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끓어 버렸다. 이에 죽죽은 남은 군사들을 모아 성문을 닫게 한 다음 응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이 때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이미 기울어져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우선 항복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자.”고 말

했다. 죽죽은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우리 아버지가 내 이름을 죽죽(竹竹)이라고 지어 줄 때는 어떠한 풍파나 곤경에 처하더라도 이를 기어이 극복해야 하며, 또 세한(歲寒)에도 시들지 않고 비록 꺽일지언정 절대로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을 하겠느냐.”며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용전분투하다가 대야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때 사지 용석도 같이 전사하였다. 대야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죽죽과 용석의 충의의 정신은 신라군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합심하여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조선 인조 22년(1644) 옛 격전지에 죽죽장군의 얼을 깊이 심고자 ‘신라충신죽죽지비(新羅忠臣竹竹之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는 지금도 함벽루(涵壁樓)가는 길목에서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23,01330000,38&queryText=(`대야성`)<in>(z_title,z_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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