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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우두벌

노촌魯村 2009. 2. 12. 23:21

7) 우두벌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은 삼국통일기의 화랑 죽지랑(竹旨郞)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오는 곳이다. 그의 부친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였기에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두동의 우두벌은 죽지랑이 말 타는 법을 익혔던 벌판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죽지랑은 이름을 죽만(竹曼), 지관(智官) 등으로도 불렸다. 일찍이 화랑이 되어 수련을 쌓아 인품과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다. 진덕여왕 3년(649) 그는 김유신장군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고, 진덕여왕 5년(651) 집사부의 우두머리인 중시가 되어 왕정의 기밀을 관장하였다. 무열왕 8년(661)에는 무열욍이 웅진성을 구원할 때 참전하였고, 그 해 문무왕이 즉위하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평정할 때 경정총관(京停摠管)으로 활약하여 공을 세웠고, 문무왕 10년(670) 당과 싸워 백제의 7성을 빼앗았고, 석성(石城)에서 당의 군사를 물리쳐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어 삼국통일의 수행과 통일 이후의 어려운 국사를 처리하였다. 그의 만년인 효소왕 때 그의 낭도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의 인간적인 훈기를 느낄 수 있다.

감대문의 화랑세기에는 훌륭한 충신과 용감한 병사가 모두 화랑 가운데 나왔다고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신명을 바쳐 싸웠고 화평의 시대에는 충신으로서 나라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 화랑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죽지랑은 문무겸비의 이상적인 화랑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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