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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적성산성(赤城山城)과 적성비(赤城碑)

노촌魯村 2009. 2. 13. 11:23

 

적성산성(赤城山城)과 적성비(赤城碑)

 

 적성산성(赤城山城)은 사적 제265호로 충북 단양읍 하방리에 있다. 1978년 이 성안에서 신라 적성비(赤城碑)가 발견되어 유명해진 성이다. 적성비의 비문에 ‘적성(赤城)’이라는 글자가 3번이나 나와서 이 성의 이름이 적성산성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적성현으로 신라가 점령한 다음에 성을 쌓아 이름을 그대로 적성이라 불렀다. 이 성은 둘레가 922m의 석성(石城)으로 자연석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안에 큰 우물이 하나 있다. 성문이 남으로 있는 점으로 보아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고구려의 대응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적성비는 산성 안의 높고 평탄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화강암 자연석의 곱고 판판한 면을 이용하여 비문을 얕게 파내어 새겼으나 오랫 동안 묻혀 있어서인지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이 분명하다. 윗폭이 107cm, 아랫폭이 53cm, 높이 93cm 정도로서 위쪽이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좁아진 돌에 22줄로, 각 줄 마다 22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이사부, 무력(武力) 등 진흥왕 때 크게 활약한 인물들이 있어 진흥왕 6년에서 12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이 적성비는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나아가서 신라가 죽령을 넘어 웅비를 도모랄 의지를 표명한 척경비이다. 신라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물리 친 후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 10개 군을 점령한 사실과 관련된 비석일 것이다. 특히 이 비의 건립 시기가 화랑제도가 확립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점이 주목된다. 진흥왕 때는 화랑제도가 확립되면서 비약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적성비는 바로 그 팽창의 신호탄으로 볼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제도로 바꾸었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부연하여 최초의 화랑을 설원랑(薛原郞)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에 화랑제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89년에 발견된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은 학계의 검토가 끝난 사료는 아니지만 설원랑에 훨씬 앞서 위화랑(魏花郞)이 최초의 화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진흥왕 초엽 적성비를 세운 시기는 화랑도가 공인된 조직체가 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문화재청 자료) :

 

흙발에 차여 발견된 단양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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