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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월촌공원(월곡역사박물관)

노촌魯村 2009. 9. 15. 13:18

 

 단양우씨 월촌 세거지(世居地)

 

 월촌마을 연혁

월곡역사공원은 월곡공원에 연접한 단양우씨종중 제실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념비 등과 연계한 역사공원을 조성하여 역사 교육장 및 특색있는 휴식공간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향토의 역사.전통문화유산과 대나무산책로 등의 공원시설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주민의 휴식 및 운동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월곡역사박물관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운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옛 농기구와 생활용품, 보물 제1334호인 “화원우배선의병 진군공책”, 서간문, 고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① 전통건축물 : 낙동서원, 열락당, 덕양제 ② 기념비 : 민족정기탑, 의병장 우배선선생 창의유적비, 파리장서비 ③ 운동시설 : 게이트볼장, 족구장, 체력단련시설 ④ 기타 시설물 : 송림지, 대나무산책로, 연못, 전통석물, 초정(草亭), 어린이놀이터

 

월곡역사박물관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운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옛 농기구와 생활용품, 보물 제1334호인 “화원우배선의병 진군공책”, 서간문, 고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월곡역사박물관

 

 

 

 

 

 

 

 

 

 

 

 

 

 

 

 

 

 

 

 

 

 

 덕동서원

 

 

  

각태기(문화재청자료사진)

 간찰(문화재청자료사진)

 교지

 군공책(문화재청자료사진)

화원우배선의병진군공책및관련자료(花園禹拜善義兵陳軍功冊및關聯資料.보물  제1334호 )

조선 중기의 의병장·문신인 월곡 우배선(1569∼1620) 장군의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과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우배선은 성주 화원현에서 태어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화원과 대구 일원을 중심으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의병활동의 포상으로 합천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또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화원 우배선 의병진 군공책〉은 〈의병군공책〉을 비롯하여 첩, 소지, 전령 등 12종 20건의 문서가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의병군공책〉은 의병 우배선을 비롯하여 그 부하의병 88명의 군공을 적고 있는데, 이들이 올린 전공은 참살 63명·사살 604명·작살 110명으로 작은 의병부대로서의 전과로는 엄청난 수이다. 관련문서는 우배선의 사령교지 10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증교지 각1점, 정인홍의 간찰, 선조말엽 주요 관원들의 성명·관직명·주소 등이 적힌 각택기 등 13점이다.
임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특히 〈의병군공책〉은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전공(戰功)보고서로 임진왜란 때 대구 지방의 의병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의병장  월곡 우배선선생 창의유적비

 

 낙동서원

역동 우탁(易東 禹倬)선생을 모신 낙동서원(洛東書院)이 있다. 선생의 호는 단암(丹巖) 인데 세상에 ‘우역동선생’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주역(周易)이 동국에 전해 졌으나 능히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선생이 이를 깨우쳐 후학을 가르친 데서 유래 했다. 선생은 고려 충선왕 때 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을 역임하고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으면서 왕이 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을 범하는 불의를 보고 상소를 올인 후 도끼를 들고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니 측근 신하가 왕 앞에서 감히 상소문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선생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이 여러 번 불러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선생은 나가지 않았다. 이 낙동서원은 1708년에 덕동(德東)서원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흥선대원군 집정시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던 것을 1965년에 중건한 서원이다.

 

 

 열락당

정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정자 열락당(悅樂堂)이 있고, 기둥에는 ‘배워서 익히는 기쁨과 벗이 찾아 오는 즐거움’(學而時習進取之悅 有朋自來趨向之樂)을 뜻하는 주련이 걸려 있어서 ‘열락당’ 이라는 당호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열락당은 월곡선생이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강학사(講學舍)를 짖고 후학을 가르쳐 왔으나 오랜 세월로 퇴락하였던 것을 지난 1995년에 중건한 것이다.

 덕양재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1919년 기미독립운동을 3.1절로 명심하고 있는 우리는 이때 또 하나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의거를 잊어가고 있다. 이에 충절의 마을 월촌동(현재의 상인동)에 기념비를 세워 장서를 새기고 그 아래 장서의 작성 경위와 요지를 기록하여 길이 남기고자 한다. /1997년7월 영남대학교 문학박사 심재완 짓고 김영숙 씀./
유림대표로 곽 종석이 추대되어 글을 짓고 곽 종석, 김 복한 등 137인이 연서하였다. 김 창숙이 주동하여 서울과 영남 각지와 호남 동서부까지 연락하고 경비를 마련하자 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를 건너가서 다시 중·영문으로 번역하여 삼종의 장서를 김 규식 편에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한편 중국 언론기관과 일본에도 발송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일경의 검거탄압이 심하니 관련자는 옥사 또는 망명하게 되었다. (대구광역시문화관광자료)

 

 

 

성균관부관장 우종식 공적비

의마비

임란 때 월곡공(月谷公: 선조 때 의병활동을 한 우 배선)이 백의로 창의(倡義), 대구근교의 각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때 교전 중 적탄이 쏟아지는 진중에서도 애마의 기민함으로 위급을 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조암평야(현재의 월암동)에는 야생마가 많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성질이 사나와서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야생마를 그 당시 단양우씨 문중의 종손인 월곡 우 배선이 다루니 그를 아주 잘 따랐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월곡공이 의병장이 되어 이 말을 탔는데 말이 총명하여 적의 화살이 주인에게 날아오면 무릎을 꿇어 주인을 여러 번 구하였다. 난이 수습된 후 월곡공이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지만 얼마 후 월곡공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이 말은 먹이를 먹지 않고 울기만 하더니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의마라하여 의마총을 만들었다(대구광역시문화관광자료)

 

 우배선 나무

 

 정략장군 우전 유허비

 

 순국지사 월해 우병기 추모비

 

 

 민족정기탑

 

 

 장지산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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