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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해미읍성(海美邑城)

노촌魯村 2010. 1. 30. 23:13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이 성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으로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에 옮겨져서 해미읍성으로 이용되었고,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성벽이나 담벼락에 높이 쌓아 올린 돌. 홍예석 옆에 층층이 쌓는 네모반듯한 돌.)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문화재청 자료)

 

해미읍성 항공 사진(문화재청 자료) 

 해미읍성 항공 사진(문화재청 자료)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홍치()   : 중국 명나라 효종 때의 연호(1488 - 1505)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시도기념물  제172호 (서산시) )

 

 

 

 순교기념비

고종3년(1866)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고문한 회화나무와 자리갯돌(해미수교기념관으로 옮김) 등이 남아있다

 

 

 

 

 

 

 

 

 

 민가 말단관리인 서리의 집

 

 

 

 민가(상인의 집 재현)

 

 

 

 화장실

 

 

 

 

 

 

 민가(부농의 집 재현)

 

 

 베틀

 

 화장실

 

 

 

 

 

 동헌

 

선조12년(1579)에 이순신이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잠깐 근무했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