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김생의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를 탁본한 후 자신의 호가 아닌 이름을 표기(正喜手拓)하며 김생을 찬탄했다함
김생 -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 신라 때 문신 최인곤(崔仁滾)이 짓고 석단목(釋端目)이 명필 김생(金生)의 서를 지름 2~3 cm의 해서(楷書)로 집자(集字)해서 만들었다. 신라 말 경명왕(景明王) 때 세란(世亂)으로 세우지 못하였다가 954년(고려 광종 5)에 이르러 경북 봉화(奉化) 태자사에 세웠다. 그 후 영천(榮川)으로 옮겨졌으며 이웃 군의 원으로 있던 김광수(金光遂)가 이를 탁본하여 세상에 돌렸다고 한다. 비의 측면과 《약천집(藥泉集)》에 의하면 1509년(조선 중종 4)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이 비를 본군(本郡)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옮겼고, 명종(明宗) 때에는 중국사람이 여기 머물면서 주야로 수천 본을 탁본해갔다고 한다. 비신(碑身)은 1918년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 옮겨졌다.
태자사지귀부 및 이수 (太子寺址龜趺 및 螭首.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8호.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1082)
지금은 폐교가 된 태자분교 왼쪽의 밭가에 자리하고 있는 비의 일부분으로, 이곳에 자리잡았던 옛 태자사의 유물일 것으로 짐작된다.비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낭공대사의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현재 비몸은 사라지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있다. 네모진 바닥돌 위로 엎드려 있는 비받침의 형상은 전체모습이 닳아 있어서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받침 위에 놓아둔 머릿돌은 구름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으며, 앞면 가운데에는 비명칭을 새기는 네모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제작된 시기는 조각수법과 형태로 보아 고려 전기인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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