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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 도피안사(鐵原 到彼岸寺)

노촌魯村 2012. 6. 30. 16:24

 

            

도피안사(到彼岸寺.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 말사.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관우리 450번지)

이 절은 865년 (경문왕 5)에 처음으로 산문(山門)을 열었다. 당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향도 1500여명과 함께 이 절을 창간하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유점사본말사지 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이 절을 비보국찰(裨補國刹)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화개산이 물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디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1천여년 동안 국가의 비보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자세한 중건중수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뒤 1898년 봄에 큰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고 비로자나불좌상도 비바람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영주산인(靈珠山人) 월운(月運)스님이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을 받아 법당 3칸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후불탱화도 조성하여 모셨다. 그리고 1914년에는 강대용이 화주(花主)를 스스로 맡아 칠성각과 산신각을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주지 의권(義權)스님이 모든 건물을 새롭게 보수하였고, 1933년에는 당국과 교섭하여 절입구까지의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6․ 25사변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불상 또한 땅에 묻히고 말았다. 1959년 제15사단장 이명재(李明載)장군은 도피안사의 부처님이 나타난 꿈을 꾸었다. 이튿날 전방시찰을 나갔던 이장군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한 민가에 들어갔다가, 그 집 안주인의 모습이 꿈에서 본 여인과 꼭 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장군은 꿈에서 본 절터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여인으로부터 그 자리를 인도받아 장병들과 함께 절을 중건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찰관리는 군에서 맡았으며, 1985년 사찰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었다. 1986년 주지로 취임한 대원(大圓)스님은 1988년 5월 20평의 대적광전(大寂光殿)과 삼성각(三聖閣)․ 요사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대적광전과 정면3칸, 측면1칸의 삼성각, 요사 등이 있으며,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이 밖의 성보로는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좌상 뒤쪽의 후불탱화와 좌우의 지장탱화․ 신중탱화, 삼성각 안의 칠성․ 산신․ 독성탱화, 전라남도 장홍 보림사(寶林寺)의 석등을 모방하여 1992년 10월에 세운 대적광전 앞쪽 좌우의 석등 2기 등이 있다. 이제 민간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된 도피안사는 잦은 이적을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가피와 더불어 불교도들의 마음을 맑히는 대도량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리라.의 석등을 모방하여 1992년 10월에 세운 대적광전 앞쪽 좌우의 석등 2기 등이 있다.
이제 민간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된 도피안사는 잦은 이적을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가피와 더불어 불교도들의 마음을 맑히는 대도량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리라.(대한불교진흥원 자료)

 

 

 

 

 

 

도피안사(到彼岸寺): 대적광전(大寂光殿)

도피안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이다. 6.25 때 소실된 것을 1959년 주지 김상기(金相基)와 15사단의 장병들이 함께 중건한 것으로, 막돌 바른층쌓기로 다듬은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맞배집의 겹처마를 하고 있는 단촐한 건물로 모로단청이 약하게 되어 있는 조촐한 모습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잘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치고 주두를 얹었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이나 살미부분은 익공형식을 하고 있으며, 박공부분에는 풍판이 없는 모습이다. 전면 어칸과 협칸에 4분합의 띠살창으로 단장하고 어칸 상부에 가야산인(伽倻山人) 인문 송월(印文淞月)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대적광전은 원래 화엄경에 나타나는 최고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으로, 건물 내부에는 865년에 조성된 철조비로자나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鐵原 到彼岸寺 三層石塔.보물 제223호.강원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23)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63호.강원 철원군 동송읍 도피동길 23)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문회재청 자료)

불상의 뒷면에는 100자의 긴 명문이 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은 865년(신라 경문왕 5)에 철원지방의 신도 1천500명이 뜻을 모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전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香徒佛銘文幷序夫釋迦佛晦影歸眞遷儀越世紀世掩色不鏡三千光皈一千八百六載耳慨斯怪斯彫此全○○○來哲困立願之唯願卑姓室遂棨椎自擊○○覺長昏換庸鄙志契眞源怒以色莫朴○見唐天子咸通六年乙酉正月日新羅國漢州北界鐵員郡到彼岸寺成佛之侍士○龍岳堅淸于時○覔居士結緣一千五百餘人堅金石志勤不覺勞困

대저 석가불이 모습을 감추고 진리로 돌아가시어삼천 빛이 비치지 않은 지가 무릇 1,806년이 되었으나 슬프고도 기이하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뜻을 내어 세웠다. 당 함통 6년(경문왕 5년, 865) 1월에신라국 하주 북쪽 경계의 철원군 도피안사에서 불상을 조성할 시사(侍士)가 거사를 구하여 1천500여 명과 결연하고, 금석처럼 변하지 않는 뜻을 굳건히 하여 힘쓰니 피곤한 줄 몰랐다. 

                      

 

 

 

 

 

 불상 좌대의 복련

 

 

 

땅속에 묻히신 부처님 최초 발견하여 꺼내신 육군 제15사단 연대장 대령 고주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닮은 젊은 스님의 멋진 해설에 귀를 기울리고 ...         

 

毘盧遮那佛心咒 VAIROCANA BUDDHA (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