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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예천

예천 장안사(長安寺)

노촌魯村 2012. 7. 2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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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長安寺.경북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산54)

삼계(三界)는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으니, 금강산과 양산 그리고 이곳 국토의 중간인 용궁 비룡산 장안사이다. 초창주는 신라 경덕왕때(759) 운명조사 이시며, 그 후 고려 명종때의 지도림 화상, 조선 인조 5년(1627) 덕잠대사, 영조 31년(1755) 법림대사 등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시면서 중창하셨다. 근래에는 두타화상(頭咤和尙)이 약관의 나이로 수행정진차 전국을 행각 하던중 사세(寺勢)의 퇴락함을 보고 이곳 지역 신도들과 힘을 모아 오늘의 가람을 일으켰으니(1984~1992), 이는 불자들의 간절한 원력의 소산이라. 일찌기 고려의 문인 이규보선생이 장안사에 머무르면서 글을 지었으며, 또한 지역의 많은 인물들이 이 도량에서 원(願)을 성취하고 밖으로 역량을 발휘하기도한 유서깊은 도량이다. 현재 본당(本堂)은 대웅전이며 석가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과거에는 본당이 극락전이었으며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었다. 

 

장안사(長安寺)에서<이규보(李奎報)의 시>

 

산(山)에 이르니 번뇌(煩惱)가 쉬어지는구나.

하물며 고승 지도림(支道林)을 만났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나갈 때에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한잔 차(茶)로 서로 웃으니

고인(古人)의 마음일세.


맑게 갠 절 북쪽에는 시내의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지는 성 서쪽 대나무

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病)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 동산 소나무와 국화(菊花)는 꿈속에서 작아드네.

지도림(支道林, 314 ~ 366)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고승이다. 하내(河內) 임려(林慮) 출신.

본명은 둔(遁)으로 도림은 그의 자(字)이다. 그가 진류(陳留) 출신으로 성이 관(關)이였다고 기록되어있는 사서도 존재한다. 젊어서부터 방랑벽이 있어 발이 닿는대로 떠돌아다니며 수양을 했는데, 인품과 덕망이 높았다. 스물 다섯에 출가하였으며 여항산(餘杭山)에서 도를 닦고 깨우침을 얻었다. 53세에 낙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희지가 그를 평가하기를 '마음과 몸가짐이 밝고 맑으며, 정신과 기품이 준수하고 산뜻하다' 라고 하였다. (출처:위키백과)

이규보(李奎報) 고려 중기 문신문인(1168~1241). 자는 춘경(), 백운거사(), 지헌(), 삼혹호선()이다.

 당대 명문장가 지은 시풍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특징이다. , , 거문고 즐겨 스스로 삼혹호 선생(三酷好 :술과 시, 거문고를 몹시 좋아해서 삼혹호(三酷好)란 호를 가졌던 이규보는 술 못지 않게 차도 좋아했다)이라 칭하였다. 저서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작품 <국선생전()> 등이 있다.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는 무신의 강권통치로 인해 불교와 문학이 쇠퇴한암흑기가 아니라 불교문화와 문학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약진기였고 승려 중심의 종파 불교가 아닌 거사(居士) 불교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이규보는거사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사대부이면서 불경에 정통했고 제종파의 승려들과 깊이 교유했다. 또 불교에 관련된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비명(碑銘) 및 사찰의 기문(記文)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규보의 불교관은 선종 중심의 불교인식과 방편불교로 요약된다. 이러한선종 중심의 불교관은 선리시(禪理詩)와 선취시(禪趣詩)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규보가 남긴 불교시는 당대의 시적 경향은 물론 불교시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법보신문(2004.08.10) '96 하반기 박사학위 논문-이규보의 불교시 연구 '에서)

有我無蛙人生之限(유아무와 인생지한)

[有我無蛙人生之限] :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란 뜻입니다.
고려 말 시대...유명한 학자이셨던 이규보 선생께서 몇번의 과거에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살때 집 대문에 붙어있던 글입니다.

* 이 글에대한 유래... *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했지만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임금은 할수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 집(이규보)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한거죠.
<有我無蛙人生之限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개구리가 뭘까..?>
한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만큼의 지식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걸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감이 안잡혔죠.
주막에가서 국밥을 한그릇 시켜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집(이규보집)에 대해 물어봤지만, 과거에 낙방하고 마을에도 잘 안나오고 집안에서 책만 읽으며 살아간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집으로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루저녁을 묵어갈 수 있었습니다.잠자리에 누웠지만 집주인의 글을 읽는 소리에 잠은 안오고 해서 면담을 신청했죠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有我無蛙人生之限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있었다.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있을때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했다.바로 "3일후에 노래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두루미를 심판으로 하고서...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하기는 커녕 목소리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하다니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에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두루미한테 갔다주고 뒤를 부탁한거다.
약속한 3일이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곡씩 부르고 심판인 두루미의 판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목소리로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두루미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말은, 이규보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이규보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그 실력이나 지식은 어디 내놔도 안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덜어진다는 거다. 돈이없고,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두루미한테 상납한 개구리같은 뒷거래가 없었기에 결국은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이규보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하기에 자신도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고전국을 떠도는 떠돌인데 며칠후에 임시과거가 있다해서 한양으로 올라가는중이라 거짓말을하고 궁궐에 들어와 임시과거를 열것을 명하였다 한다.
과거를 보는날, 이규보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하고 있을때 시험관이 내걸은 시제가
<有我無蛙人生之限(유아무와 인생지한)>

이란 여덟자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때 이규보선생은 임금이 계신곳을향해 큰절을 한번 올리고 답을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를 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한다.

 

 

 

   

장안사에서 회룡포 전망대 가는 길에 있는 아미타여래 입상 


회룡대 전망대

회룡포(경북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길 362(대은리 395외))

강이 산을 부둥켜 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마을로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이곳은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 비룡산은 숲속 등산로와 원산성, 봉수대 등 역사적 정취가 숨 쉬는 자연공원으로 산책과 등산코스로 적합하다. 또한 이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운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으며 이 사찰의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어 회룡포 마을의 절경이 한눈에 들여다 보인다.2000년도에 방영되었던 KBS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의 초기배경이 이곳 회룡포와 용궁면 소재지로 하여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회룡대는 백두대간 문수지맥으로 학가산과 검무산을 지나 내성천과 더불어 회룡포(국가명승 제16호) 물돌이로 이어진 곳으로, 신령스러운 용이 승천하는 듯한 형국으로 천하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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