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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포항 법광사지 (浦項 法光寺址)

노촌魯村 2012. 8. 20. 22:20

2021. 1. 27 촬영

 포항 법광사지 (浦項 法光寺址.사적 제493호.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967번지 일원)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 왕명에 의해 처음 건립 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중건하였으나 1863년 불타 없어 졌으며, 절터 아래쪽에 있는 현재의 건물들은 195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절 이름을 법광사라고 한 것은 신라 불교를 중흥시킨 법흥왕의 법자를 따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라고 한다. 진평왕은 여러번 법광사 대웅전에 와서 직접 불공을 올렸으며, 대웅전에 걸었던 법광사라는 현판도 진평왕의 글씨였다고 전하고 있다. 법광사지 터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석조 유물 중에는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4층으로 된 사리탑
과 새로 지은 법광사 대웅전 내에 있는 높이 1.1m, 지름 2.2m의 연화석불대좌(蓮華石佛臺座), 그리고 사적비(事蹟碑)와 너비 1.4m, 높이 1.8m의 쌍두귀부(雙頭龜跌), 불교의식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석조당간지주(石造幢竿支柱) 등이 있다. 또한, 조선 영조 때에 세운 사리탑 중수비(重修碑)가 있어 법광사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가 전하는데 비문에 의하면 신라24대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무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를 내오고자, 진흥왕이 궁으로 맞아 들였다. 그 뒤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원효에게 명하여 법광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또한 비문에 보면 비문을 작성하던 당시(1750년 영조 26)에만 2층의 대웅전,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석가 불사리탑》은 828년(흥덕왕 3년)에 세우고 846년(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옮겼는데, 「법광사 석가불사자리탑중수비」에 보면 조선시대에 중수하면서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 그 날 밤 사리를 열자 서광이 하늘까지 이어져 비쳤으며, 닷새 동안 둘레를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 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 고을을 ‘신광현’이라 부르게 되었고 전한다.(출처 : 향토 자원) 

2021. 1. 27 촬영
연화석불대좌(蓮華石佛臺座)
2021. 1. 27 촬영

금당지는 외진주와 내진주 그리고 고막이돌을 갖춘 이중구조의 폐쇄적 건물로 감은사 금당지 및 불국사 대웅전과 같이 사방으로 출입문과 계단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8~9세기) 건물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세운 '석가불사리탑' 비문에는 5칸 중층 건물로 기록돼 있다. 연화석불좌대는 소실된 대웅전 석가불의 좌대로 추측되는데, 높이 1.1m, 직경 1.1m, 직경 2.2m, 둘레 7.3m이다.

2021. 1. 27 촬영
쌍두귀부(雙頭龜跌)
2021. 1. 27 촬영
당간지주(2021. 1. 27 촬영)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사리탑
2021. 1. 27 촬영
2021. 1.27 촬영
법광사 석가불사리탑 중수비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법광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납석제ㆍ청동제 사리호와 2매의 탑지석

( 탑 안에서 나온 2개의 사리호는 각각 청동제와 납석제로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납석제 사리호는 공 모양의 사리기는 인도 초기에 유행했던 모양을 따르고 있어 8세기 무렵 조성됐음을 보여준다. 안에는 8과의 사리가 봉안됐으며, 겉면에는 묵으로 쓴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라는 구절이 있다. 높이 7.5cm의 청동제 사리호는 납석제 사리함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 사리 외함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매의 탑지석 가운데 신라 때 만들어진 1석에는 ‘회창 6년 병인 9월 옮겨 세우고 수리하다. 원컨대 대대로 단월은 정토에 태어나시고 금상께서는 복과 수명이 길이 뻗치소서. 안에 사리 22매를 넣다. 상좌 도흥(道興) 대화 2년 무신 7월 향조(香照)스님과 비구니 원적(圓寂)이 재물을 희사하여 탑을 세웠다. 절의 단월은 성덕대왕(成德大王)이며 전(典)은 향순(香純)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대화 2년은 흥덕왕 3년(828)으로, 이 때 향조.원적스님 시주로 탑이 세워졌으며, 회창 6년인 문성왕 8년(846)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됐다는 내용이다. (성덕대왕 :성덕대왕 김균정(?~836)은 원성왕의 손자이자, 신무왕.헌안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822년 발생한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고 상대등에 오르지만,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고 난 뒤 벌어진 왕위다툼에서 불행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신무왕이 즉위하자 성덕대왕으로 추존됐다.) 

진평왕의 숭안전
법광사지 발굴 모습

법광사지 서편의 법광사(1936년에 재건)

<宿>

丹靑

옛 벽의 단청은 떨어져 나가고,

經營歲月 흘러간 세월 오래기도 하구나. 새는 지저귀나 사람은 참으로 고요하고, 꽃은 지고 잎은 그늘을 이루었네.芳草沿 향기로운 풀이 섬돌을 따라 짙고,淸風 맑은 바람은 나무그늘에 불어오네. 별봉에서 호소하듯이 울부짖는 표범소리, 문득 옛 산의 마음을 일깨우네.

(세종17-성종24, 1435-1493)

2023년 7월 25일 법광사지 모습

숭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