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포항

포항 오어사 동종(浦項 吾魚寺 銅鍾)

노촌魯村 2015. 8. 14. 23:03

 




포항 오어사 동종(浦項 吾魚寺 銅鍾.보물  제1280호.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오어로 1, 오어사 (항사리))

신라시대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고려 범종으로, 종의 꼭대기 부분에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하는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몸통부분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의 띠를 두르고, 같은 무늬를 새겨 넣었다. 3분의 1되는 곳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가 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종을 치는 곳인 당좌를 따로 둔 것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종 몸통의 문양을 보면 서로 마주보고 꽃방석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보살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범자가 들어간 위패형 명문으로 장식하였다.
고려 고종 3년(1216) 주조되었고, 무게가 300근이나 되고 오어사에 달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종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고려 고종 3년(1216년)에 주조된 오어사 동종은 1995. 11. 16 오어사 상류준설 작업중 굴삭기 기사 이욱형(李旭炯 : 포항시 남구 송도동)씨가 발견하였다.오어사 동종은 신라 동종(銅鐘)의 주양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 동종(銅鐘)으로서 양주(陽鑄)된 각종 장식문양(裝飾文樣)과 더불어 주성(鑄成)이 우수한 작품이다.
종(鐘) 정상에 신라종(新羅鐘)의 특징인 각통(角筒)을 등지고 있는 용두(龍頭)가 갖추어져 있고 종신(鐘身)은 편상(扁上)에 연화판(蓮花辦)을 일렬로 세워 돌린 입상화대(立狀華帶)가 있고 그 아래에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된 편대(扁帶)가 돌려져 있으며 종신하록(鐘身下綠)에도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장식한 구록대(口綠帶)를 돌렸다. 또 편대(扁帶) 아래쪽에 붙여서 4개소에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된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내구(乳廓內區)에 연화(蓮花)를 세주(細鑄)한 돌기(突起)된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그리고 종신(鐘身)의 남은 공간에는 전후(前後)에 연화문(蓮花文)으로 양주(陽鑄)한 당좌(撞座)를 배치하였고, 당좌(撞座) 위에는 육자(六字)로 된 범자문(梵字文)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또 양 당좌(撞座) 사이의 남은 공간에는 운상(雲上)의 비천상(飛天像)을 세명(細明)하게 양주(陽鑄)하였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당좌(撞座) 사이에 각도(刻刀)로 새긴 조성명문(造成銘文)이 있다. 당좌 위에 범자문을 새기거나 용통 상부를 여의두문(如意頭文)으로 장식한 점, 비천상이 구름위의 연화좌(蓮華坐) 위에 앉아 있는 모습 등은 신라종에서 변화를 보인 고려시대 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뉴의 머리쪽에 해당하는 종신부분의 왼쪽 하부, 비천상과 당좌 사이에는 7행 82자의 종기가 음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동화사(棟華寺) 순성(淳誠)대사를 도감으로 하여 사부대중의 힘을 모아 300근의 종을 대장(大匠) 순광(淳光)이 만들어 오어사(吾魚寺)에 달았으며, 그때가 정우 4년 병자(貞祐 四年 丙子), 즉 고려 고종 3년 5월 19일임을 알 수 있다. (출처:포항시청)
※ 재질 및 규격 재질 : 청동(靑銅) 무게 : 180kg(300근) 규격 : 종전고(鐘全高) : 96cm , 종신고(鐘身高) : 71.5cm , 종구직경(鐘口直徑) : 56.5cm , 종편직경(鐘扁直徑) : 39cm , 편대폭(扁帶幅) : 4.5cm , 구록대폭(口綠帶幅) : 6cm , 당좌경(撞座徑) : 12cm , 각통고(角筒高) : 17cm


 

 

 

  

오어사의 원효대사 삿갓



포항 오어사(浦項 吾魚寺)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오어로 1

신라 26대 진평왕 때 창건된 사찰로 당초에는 항사사라 불렀으나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이 곳에서 수도할 때 법력으로 개천의 죽은고기를 생환토록 시합을 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다른 한 마리는 살아서 힘차게 헤엄치자, 그 고기로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하여 「나“吾”, 고기“漁”」자를 써서 오어사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