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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얼굴무늬수막새 수증受贈40주년 기념(신라문화재 속의 얼굴)

노촌魯村 2012. 11. 6. 20:11

 

 

“신라의 미소”로도 잘 알려져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는 경주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고대의 미술에서 사람 얼굴을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주술적呪術的인 목적이나 나쁜 것을 물리쳐달라는 벽사적辟邪的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얼굴무늬수막새는 험상궂거나 무서운 표정 대신에 웃음으로써 나쁜 것을 달래서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수막새는 원래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당시 경주에 살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일본인 의사가 한 고물상에서 구입했던 것입니다. 이 수막새는 1944년 다나카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으나, 경주박물관 박일훈 관장의 노력 끝에 1972년 10월 다나카가 직접 박물관에 찾아와 기증하므로써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올해는 얼굴무늬수막새가 우리 곁에 돌아온 지 꼭 40돌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증자인 다나카씨의 고마운 뜻을 기리면서, 얼굴무늬수막새의 출토지와 의미, 얼굴무늬가 표현된 다른 미술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출처 : 경주박물관)

전시를 열며

경주박물관의 얼굴무늬수막새는 경주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경주시내에서는 안내판의 배경 사진은 물론, 버스, 골목 담벼락, 빵집, 간판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 얼굴무늬수막새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막새에 새겨진 얼굴을 두고 ‘신라의 미소’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작은 기와 조각에 불과 할지라도 이 수막새에 표현된 얼굴의 표정이 신라 사람들의 맑고 밝은 심성을 꾸밈없이 잘 표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신라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얼굴무늬수막새는 언제 어디서 출토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경주의 한 고물상에 있던 것을 당시 경주에 살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한 일본인 의사가 구입하였습니다. 훗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을 역임하는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재임 1938~1945년)는 같은 해에 이 수막새를 글로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소장자 다나카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이 수막새의 존재를 오랫동안 인지해 오고 있던 국립경주박물관의 박일훈 관장(재임 1963~1973년)이 오사카 긴타로를 통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수막새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다나카를 설득하였습니다. 마침내 다나카는 그 말에 공감하여 1972년 10월 14일 국립경주박물관에 직접 찾아와 이 얼굴무늬수막새를 기증하였던 것입니다.

올해는 얼굴무늬수막새가 우리 곁에 돌아온 지 꼭 40돌이 되는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다나카씨의 고마운 뜻을 기리면서, 아울러 문화재 기증의 큰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작은 전시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얼굴무늬수막새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출처 : 경주박물관)

기증자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 1908~1993) 약력

- 1933년 오사카(大阪)의과대학 졸업

- 1933년 5월 우리나라에 와서 경주 야마구치(山口)의원 의사로 재직

-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가 기타규슈(北九州) 야하타니시쿠(八幡西區)에서 병원 운영

- 기타규슈시립박물관에 얼굴무늬수막새를 제외한 소장 기와 일체를 기증

- 1972년 10월 14일 경주박물관에서 얼굴무늬수막새 기증식  

 

얼굴무늬수막새의 특징과 출토지

수막새는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것으로 무늬는 연꽃이 많지만, 사람 얼굴을 새긴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곱게 다진 흙으로 만든 이 얼굴무늬수막새는 높은 온도의 불에 구워서 단단합니다. 뒷면 위쪽에는 긴 원와圓瓦를 접합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었기에 양쪽 눈과 광대뼈가 비대칭을 이루는 등,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테두리는 넓은 편인데 무늬를 넣지 않았습니다. 큼직한 코와 위로 올린 입꼬리의 고졸古拙한 미소 등,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에서 신라 미술의 자연스러움이 엿보입니다.

얼굴무늬수막새는 삼국시대 당시 어디에 있던 것일까요? 이 수막새가 발견된 장소는 경주읍 사정리沙正里(지금의 사정동)였다고 합니다. 사정리는 국당리菊堂里라고도 불리며,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곳으로 전해왔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이래 한동안 이 수막새는 흥륜사 터 출토품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사정리의 이 절터는 흥륜사가 아니라 영묘사靈妙寺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절터에서 ‘대영묘사大令妙寺'나 '영묘지사靈廟之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삼국유사』에 따르면,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사천미沙川尾)‘에 있다고 하는데, 사천은 곧 남천南川을 뜻하므로 이곳이 지금의 사정동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원래의 흥륜사 터는 사정동의 북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얼굴무늬수막새는 영묘사의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인 635년에 창건된 영묘사는 석가모니부처 이전의 부처 때 세워졌던 일곱 개의 절터 중의 하나로 알려진 신라 불교의 성지입니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의 세 가지 지혜로운 일(지기삼사知幾三事)을 비롯하여,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탑을 돌며 불로 변해 죽은 지귀志鬼의 일화가 전합니다. 이 절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했던 고승 양지良志가 만든 전탑殿塔의 기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일들이 많았던 이 절의 어느 건물에 얼굴무늬수막새가 올려져 있었는지 궁금합니다.(출처 : 경주박물관)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 신라 7세기, 전 경주시 사정동(추정 영묘사 터) 출토, 길이 11.5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무늬사래기와(人面文望板瓦), 통일신라, 출토지 미상, 높이 17.4cm, 국립경주박물관

사래기와(망판와)는 서까래기와의 한 종류로, 목조건물 지붕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부분(사래)을 장식합니다. 아래쪽에는 반원형의 얼굴에 눈코입을 익살맞게 표현하였고, 그 위쪽으로는 불꽃 또는 구름무늬를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가운데 윗부분에는 사래에 고정하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참고사진: 경주박물관 남측 발굴지 출토 얼굴무늬수키와

경주박물관의 확장 공사를 위해 현재 발굴 중인 남쪽 터에서 나왔습니다. 출토지점은 조사구역 남동쪽의 배수로입니다. 기왓등의 서너군데에 얼굴무늬가 보이며, 틀로 찍은 듯 형태가 같습니다. 몇 개의 선으로 조합하여 단순하지만 얼굴의 요체를 성공적으로 구현했습니다. 활짝 웃는 표정은 유쾌하고 솔직했던 신라인들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 통일신라, 출토지 미상, 길이 15.1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의 윗부분은 결실되어 지금은 코와 입 언저리만 남아있습니다. 테두리에 규칙적으로 돌린 작고 동그란 연주무늬는 통일신라 수막새의 특징입니다. 얼굴은 웃는 표정이 아니라 약간 찡그린 듯한 모습 입니다. 두툼한 콧망울과 큰 입, 그리고 입 주위에 형성된 깊은 골주름이 강한 인상을 줍니다. 신라 얼굴무늬수막새의 한 예로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얼굴무늬기와편(人面文瓦片), 통일신라, 대구 부인사 터 출토, 높이 8.8cm, 국립경주박물관

기와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원래의 정확한 전체 형태는 알 수 없습니다. 코와 양쪽 눈 부분만 남아있습니다. 코는 크진 않지만 콧대가 일자로 내려왔습니다. 완만한 곡선의 눈썹 아래로 약간 튀어나오게 만든 눈은 멀리서 보면 명암효과를 일으켜 마치 지긋이 감고 명상하는 것 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얼굴무늬토기편(人面文土器片), 통일신라, 경주 첨성대 서남편, 현재 높이 5.8cm. 국립경주박물관

굵은 점을 찍어 만든 눈, 비뚤어지고 넓게 퍼진 콧망울, 어정쩡하게 벌린 입으로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얼굴 양 옆 위쪽에는 주위에 점이 돌려진 마름모꼴의 무늬가 배치되었고, 코 옆으로는 한 줄이 돌려져 있으며, 그 아래로는 연속된 수직선이 새겨져 있습니다. 통일신라 때 제작된 인화문印花文토기의 일종입니다.

얼굴무늬토기(人面文土器), 통일신라, 월지(구 안압지) 출토, 입지름 9.8cm, 국립경주박물관

움푹하게 파인 바리의 한 귀퉁이에 사람 얼굴의 윤곽은 표현하지 않고 눈코입만 묘사하였습니다. 흙을 덧붙여 만든 뭉툭한 코는 한쪽으로 쏠려 있고, 눈과 입은 간단하게 파 넣었습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묘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이 바리를 일상생활의 음식그릇으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제사나 의례 등 다른 용도로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얼굴이 그려진 목간(人面文木簡), 통일신라, 경주 월지(구 안압지) 출토, 길이 21.0cm, 국립경주박물관

글씨를 쓰는 종이가 귀했던 고대에 종이의 대용품으로 사용했던 목간입니다. 위쪽에는 똑같은 글자를 반복하여 써서 글씨를 연습하였습니다. 중간과 그 아랫부분에 간단한 필치로 얼굴을 그렸는데, 얼굴 위로 눈썹과 코를, 얼굴 아래로는 눈 부분만을 따로 그려 연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낙서를 연상시킵니다.

 

영상자료(안내 슬라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