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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노촌魯村 2013. 3. 3. 16:36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충남 공주시 소학동 76-6)

한채의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비로, 향덕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대의 사람으로,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의 효행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채, 토지를 내려 주었으며, 비를 세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리’라 하였다. 앞에서 보아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더 오래된 비로,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새긴 문구중에 ‘중립(重立:다시 세움)’이라는 글귀가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의 것이긴 하나 경덕왕 때 세운 원래의 비는 아닌 듯 하다. 왼쪽의 비는 8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몸의 윗변을 둥글게 다듬어 놓았다. 역시 향덕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조선 영조 17년(1741)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써서 세워 놓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효행을 표창받은 인물이며,『삼국사기』에 그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어, 효행사적으로 볼 때에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문화재청 자료) 

 

 

효자향덕비 옆에 1741년(영조 17)에 세운 새 정려비가 있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1741년(영조 17)에 세운 정려비의 앞면에는 “지극하여라, 효자여/ 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 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 마을이 효자로서 이름났으니/ 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允矣孝子 克全彛性 旣 其股 亦厥 王庸是嘉 爾田爾宅 地以人名 百世不朽)”라는 시가 쓰여 있다.

 

효자 향덕비는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하단부만 남아 있는데 앞면에 ‘지려(之閭)’라는 글자가 남아 있어 정려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축삼월일중립(丑三月日重立)’이라 하여 건립의 시기가 새겨져 있지만, 역시 윗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건립 시기는 불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효행이 기록되어 있고, 『동국삼강행실(東國三綱行實)』에 그림과 함께 효행이 소개되어 있다. 755년(경덕왕 14) 봄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고 전염병까지 돌았다. 부모 공양이 막연해진 향덕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삼국사기』향덕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천보 14년(755)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거기에 전염병까지 겹쳤다. 향덕의 부모가 주리고 병들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는 종기가 나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다. 향덕은 밤낮으로 옷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였으나 봉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모두 평안하게 되었다.
향(鄕)에서는 이 사실을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명을 내려 벼 300곡(斛, 1곡은 10두)과 집 한 채, 그리고 토지 약간을 내렸다. 또 관리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기록하여 표시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 하여 ‘효가리(孝家里)’라고 한다.(출처:디지털공주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