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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복제비. 독립기념관)

노촌魯村 2012. 9. 4. 15:09

 

북관대첩비는 1708년 함경도 북평사이던 최창대(崔昌大·1669~1720)가 함경도 길주군에 건립했다.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이 이끈 의병들이 왜병을 무찌르고, 함경도로 피란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반란군을 붙잡아 처형한 공적을 두루 기렸다. 그러나 북관대첩비는 원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일전쟁(1904 ~1905) 당시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들은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1978년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가 환수 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일본 반출 100년 만인 2005년 10월 돌려받았다. 북관대첩비는 이듬해 3·1절 북한에 인도돼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제 자리에 세워졌다. 남한에는 2006년에 경복궁과 독립기념관에도 복제비가 건립됐다.

정문부(鄭文孚.1565(명종 20)~ 1624(인조 2).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해주(海州).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 한성부참군·사헌부지평·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황정욱 등을 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투항하자 의병을 조직, 국경인·국세필을 참수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어 쌍포·백탑교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관북지방을 수복하였다. 이후 영흥부사·공주목사·호조참의 등을 거쳐 용양위부호군·안주목사·남원부사 등을 지냈다.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외직을 청하였다. 24년(인조 2) 초회왕에 대하여 읊은 시로 인해,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받던 중 죽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경성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농포집》이 있습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북관대첩비 복제비는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당시 북평사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해 숙종 34년(1708년)에 세워진 대표적인 국난극복의 승전비이다. 그러나 러 · 일 전쟁 (1904~5년) 당시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강탈했으며 지난 100년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으나 우리나라의 끈질긴 요구로 2005년 10월 20일 반환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북관대첩비 원비는 2006년 3월 1일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옛 이름 길주)로 반환되었고, 2기가 복제되어 그 중 1기가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것이다. 복제비는 원래의 비신과 유사한 충남 보령 웅천산 애석을 사용하였고, 머릿돌과 받침돌은 황해도 해주에서 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높이는 2.75m이며 의병단의 활약상을 담은 1,500여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독립기념관 자료)

 

 

 

 

      

야스쿠니 신사에 있을 당시의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 복원모습 공개(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

 

[북관대첩비 복원모습.사진 : 문화재청]

 [북관대첩비 받침돌.사진 : 문화재청]

[북관대첩비 소개.사진 :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작년 10월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아 금년 삼일절에 북한에 되돌려준 북관대첩비가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 현장에 복원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과 사진 8장을 통일부를 통해 북측으로부터 전달받았다. 문화재청이 이 동영상과 사진으로 확인한 결과, 북관대첩비는 평양조선중앙통신이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난 3월 23일 원 위치인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 2만여㎡ 보호구역에 세워졌으며, 받침돌은 북측이 밝힌 대로 건립당시의 것을 인근에서 발굴하여 사용하였다. 이 받침돌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얕은 2단 높이로, 정면에서 보면 큰 화살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북관대첩비는 원위치에 있던 원래의 받침돌 위에 일제에 의해 강탈되어 100년간 방치되었던 탑신을 세우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을 갖게 되었으며, 1708년 건립된 후 이 비가 겪어온 기구한 운명과 사연을 온 몸으로 전하게 되었다. 북측은 복원된 북관대첩비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유적 제193호’로 등록하였으며, 김책시 인민워윈회 명의로 북관대첩비를 설명하는 표지석과 안내석을 나란히 세웠다. 받침돌 주변에는 작은 자갈돌을 깔았으며, 그 옆으로는 잔디를 심어 단장하였다. 지난 3월 1일 개성에서 남측으로부터 돌려받은 북관대첩비는 함경남도 단천시 용덕리와 김책시 장현동 경계인 해발 709m의 마천령(摩天嶺) 고개를 넘어서 이동돼 현지에 복원된 것이다.(문화재청 보도자료 2006. 7. 3) 

100년 만의 귀환